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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2014. 10. 24. 21:25

[황금시대] 샤오홍의 황금 시대는 언제였을까?

샤오홍의 황금 시대는 언제였을까?


1930년대 중국 작가 샤오홍. 폐결핵을 앓다 31살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작품 활동을 한 10년의 시간 동안 그녀는 세상에 약 1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운명의 남자 샤오쥔에 대해서는 단 한 문장도 세상에 남기지 않았다.


영화 <황금시대>는 작가로 살았던 그녀의 10년을 집중해서 다루었는데 그녀의 인생은 짧고 강렬했으나 영화는 길고 건조했다(러닝타임이 무려 3시간이었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감독은 '그 시대에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본' 그녀의 인생을 '황금시대'로 해석했다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운명의 남자 샤오쥔의 외도에 상처받아 떠난 침략국의 땅 일본에서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시대'라 말하고, '찬란했고 무엇이든 가능했으며 꽃은 꽃대로, 오이는 오이대로 피고 열매맺는' 유년의 정원을 잊지 못했던 그녀는,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보았으나 무엇도 온전히 가지지 못한 쓸쓸한 사람 아니었을까.


영화를 보며 '왜 그토록 지독하게 글을 썼을까?' 궁금했는데 답을 알려주진 않았다. 다만 어딜 가도 피할 수 없었던 전쟁, 격변하는 세상, 충만했으나 짧았던 사랑의 시절을 통과하며(그녀의 남자들은 왜 다들 그따위인가 ㅠㅠ) 그녀가 할 수 있는게 뭐였을까, 싶었다. 그녀는 마지막에 이렇게 독백한다. "기억해야할 순간들이 있기에 나는 기록할 수밖에 없다" 단순하지만 옳다.



그나저나 탕웨이는 여자인 내가 봐도 설레네. <섹, 계><만추> 이후 탕웨이에게 다시 반했으니, <만추> OST를 들어보자. 중국어가 이렇게 우아하다니... :)




리뷰/[영화] 2014. 3. 18. 21:25

[노예12년]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신앙일까, 양심일까?




동전의 크기를 못 넘는 야만의 역사


“최소한의 양심도 없습니까?” '깜둥이' 노예 플랫의 첫 주인 윌리엄 포드의 말에 엄마와 아이들을 기어이 떼어놓으려는 노예 상인은 그렇게 대답한다. “내 양심은 동전의 크기를 못 넘어요.” 인간의 역사가 위대하다고 하지만, 사실 '동전의 크기도 못 넘는' 야만의 역사를 은밀하게 감추며 흘러왔다. 영화 <노예 12년>은 그 야만의 역사를 정직하게 들춰 묵직하게 고발하는 영화다.


“당신은 나를 가둘 권리가 없소.” 자유인으로 태어나 행복하게 살던 예술가에서 하루 아침에 노예가 된 솔로몬 노섭은 자신을 가둔 노예 상인들에게 ‘권리’를 부르짖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주장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단어, 권리. 그러나 솔로몬 노섭이 당연히 누려야 할 그 언어는 폭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노예시장에서 1000달러에 팔린 ‘특출난 깜둥이’일 뿐이었다.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권리와 존엄마저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전 1840년대 미국은 북부의 자유주(州)에서 흑인을 납치해 남부의 노예주(州)로 팔아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솔로몬 노섭이 그 당사자였다. 그후, 솔로몬 노섭은 '플랫'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솔로몬 노섭이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그 12년의 세월을 밀도있게 보여준다. 그나마 선한 양심을 가졌던 백인 주인 윌리엄 포드에서부터 악랄한 백인 지주와 상인들에 이르기까지 착취자는 야만스러웠고, 그저 백인들의 '재산'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노예 플랫과 '깜둥이'들의 삶은 비참했고, 무기력했다. 


“목숨 건지고 싶지 않소. 살고 싶지.” 이 한마디는 솔로몬 노섭이 야만의 시간을 힘겹게 견딜 수 있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지옥같았던 12년에 비해 노예 플랫이 다시 솔로몬 노섭이 되는 과정은 비교적 간단했다. '자유 증명서는 소유 증명서를 이긴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이는 것이었다. 너무 간단하여 그의 '12년'이 더 슬프게 느껴졌다. 게다가 솔로몬 노섭이 다시 찾은 자유는 반쪽 자유였다. 그는 자유를 찾았으나 '세월'을 잃었고, 자신을 부당하게 팔아넘긴 일당들과의 소송에서는 졌다. 또한 노예 해방 운동을 벌였던 그의 죽음은 석연치 않았다. 즉, 세상은 (아직) 변화하지 못한 상태로 영화는 건조하게 끝났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신앙일까, 양심일까?



영화에서 착취자들은 노예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착취를 정당화시킬 성경구절을 찾아 은혜롭게 세뇌를 시켰다. 반면 노예들은 그런 착취자들의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하여줄 '신의 정의'를 끊임없이 갈망했다. 살기 위해 정의를 갈망하는 노예들에게 착취자의 은혜는 곧 폭력이었다. 이 가슴 아픈 간극을 지켜보며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신앙일까, 양심일까?" 물론, 선명하게 구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신앙이 양심을 견인하지 못할 때 그들의 신은 잔혹하고, 때론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의 정의를 믿으며 행동하는 양심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 영화가 개봉될 즈음 한국에서는 '염전 노예'라는 경악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노예'라는 단어가 그렇게 1840년대의 미국과 2014년의 대한민국을 연결지을 수 있는 단어라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영화는 끝났지만 인간에 대한 존엄이 무시되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긴 인간이 존재하는 야만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리뷰/[영화] 2012. 11. 26. 21:24

그 휘파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남영동 1985>




1. "여기가 남영동입니까?"라는 김종태의 질문을 시작으로, 영화의 약 90%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15호와 그 언저리를 맴돌았다. 가끔 등장하는 자막(1985년 9월 O일. O일째)을 제외하곤 그 시간들이 '1985년'의 시간들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아니, 오히려 '1985년과 현재' 그리고 '박정희와 전두환'을 연결시켜 우리가 아직 그 시간 속에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김종태가 석방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문의 시간은 끝난 것이 아니다.


2. 마지막 부분에서 고문기술자(이두한)와 복지부장관이 된 김종태의 만남 장면은 다소 아쉽다(영화 전체적으로도 아쉽기는 했다. 그러나 굳이 언급하지는 않으련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닌 영화이므로). 고문기술자가 마치 진심으로 참회한 것처럼 느껴졌기에 현실에서의 그가 결코 참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분노가 울컥!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그걸 노렸을까?) 하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여전히 들리는 끔찍한 휘파람 소리와 김근태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래 기억해야 할 눈빛이며 정신 반짝 들게 하는 라스트씬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고문 희생자들의 인터뷰는 정말 가슴이 먹먹해지는 장면이다.


3. 마지막 부분에 천정배 의원, 김민웅 교수 등 몇몇 카메오가 등장하는데 그 중 나의 마음을 가장 먹먹하게 만든 카메오는 인재근 의원이었다. 내가 그 분이였다면 아직 고통스러워 그 곳에 못 앉아있었을 것 같은데 그 분은, 강했다. 그래서 더 먹먹해졌다. 지금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목숨값 위에 서 있는 삶일까. 그리고,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을 치루어야 세상이 비로소, 좋아졌다, 여길 수 있을까. 아득하기만 하다.


4. 영화 보는 내내 '이렇게 편하게 앉아서 봐도 되나?' 미안할 정도로 마음이 불편했다.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의자에 묶여 함께 고문당하듯 본 영화'라 표현할 수 있겠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끝난 후 온 몸이 아파 한동안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5. 원래, 영화를 보기 전에는 영화를 본 후 어떤 감상평을 써 많은 이들을 영화관으로 인도할까 궁리를 했는데, 글러 먹었다. 이 영화 꼭 보시라고 감히 추천을 못하겠다. 마음이 도저히 감당키 버거워 몸까지 아픈 영화이므로.


6. 이창동 감독이 그랬던가. "영화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이 영화가, 그런 영화였으면 좋겠다.




리뷰/[영화] 2010. 4. 27. 16:15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예스맨 프로젝트>와 <디펜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예스맨 프로젝트> & <디펜더>

 

 


 

이 남자들, 수상하다! 


<예스맨 프로젝트>의 두 남자, 앤디와 마이크

1984년 12월 3일, 인도의 보팔 지역에서는 유니온 카바이드 사의 살충제 공장에서 치명적인 가스가 유출되어 150,000명 이상이 영구적으로 불구가 됐고, 그 중 22,000명이 추가로 사망하는 대 참사가 일어난다. 보팔 대참사라 불리는 이 참사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산업 사고로 기록된다. 20년 후, 유니온 카바이드 사를 인수한 다국적 기업 다우(DOW)는 대변인을 통해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보팔 대참사 희생자에 대한 보상을 전격적으로 선언한다. 이 선언은 BBC를 통해 생중계되고, 순식간에 다우 기업의 주식은 폭락한다. 진짜냐고? ‘뻥’이다. 미국 시민단체인 ‘예스맨’의 앤디와 마이크의 완벽한 ‘뻥’이었다. 앤디와 마이크는 이 외 전 세계를 누비며 아주 기막한 ‘뻥’들을 창조해낸다. 그리고 그 ‘뻥’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얼마나 모순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세계를 움직이는 권력과 기업 그리고 전문가들이 사실은 얼마나 허술한 집단인지 통쾌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행동은 ‘뻥’이지만, 그들의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세상은 ‘진실’이다.

 

<디펜더>의 이 남자, 아서 포핑턴

아이큐 80의 지적 장애를 가진 이 남자, 검은 망토와 검은 양철 모자를 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지녔지만 자칭 ‘영웅’이다. 마약에 중독된 어머니가 결국 마약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마약을 판매하는 ‘악’을 처단하고자 스스로 영웅이 되었지만, 때리기 보다는 주로 맞는 입장이라 늘 얼굴에 상처가 지워질 날이 없고, 최고의 무기는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구슬과 굶주린 말벌들 뿐이다. 스판 옷에 ‘S'를 그려넣었거나, 바지위에 팬티를 입는 혁신적 패션 감각을 지녔거나, 거대한 비밀 사무실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정의를 위해 싸울 줄 알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움직일 줄 아는 신기한 능력을 지녔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능력

 

<예스맨 프로젝트>에서 두 남자가 펼치는 ‘뻥’의 향연은 금방 들통나고 만다. 그리고, 잠시 어리둥절했던 세상은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디펜더>에서 아서 포핑턴의 행동은 그저 모자란 사람의 행동으로 취급되어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를 보고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야. 얼마나 치밀한 시스템을 통해 움직이고 있는데, 평범한(혹은 평범 이하의) 사람이 그 거대한 흐름을 변화시킬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말이 맞다.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이 변화시키고, 흐름을 바꾸기엔 너무 거대하다. 그래서 포기할 것인가?

<예스맨 프로젝트>의 ‘뻥’이 통쾌하기는 하지만 그 ‘뻥’이 드러낸 세상의 힘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사실도 정직하게 보여준다. 악을 향한 <디펜더>의 도전이 기특하기는 하지만 그 영웅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그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후를 주목한다. 영화를 보고 난 이후, 영화를 본 사람들의 변화를 이야기 한다. ‘영화 자체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변할 수 있다’라고 어떤 영화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모든 일에서 승리할 순 없는 거죠. 하지만 조금씩 쌓아 나갈 순 있습니다. 확실히 짚고 싶은 것은, 환경운동가들이 아니었다면 환경 문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했을 거란 겁니다.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스맨 프로젝트> 제작노트 중


넌 평범한 사람이지만 비범한 일을 했지. 복장은 필요없어. 평범한 사람들이 늘 비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런 영웅이 되도록 해, 아서 그냥 너 자신으로서 말이야. <디펜더> 대사  중


<예스맨 프로젝트>는 변화를 위한 지속적인 행동을 이야기하고, <디펜더>는 올바른 신념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행동이 결국 위대한 일을 일으킨다고 이야기 한다. 즉, 지금 당장 변하는 것이 없어 보이고, 실패하는 것 같아보여도 지속적인 행동을 통해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으며, 영웅이 될 만한 스펙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지금 이 모습 자체로 비범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준다.

말만 하면 ‘뻥’이 되지만, 그 말을 실천하면 ‘현실’이 된다. 물론, 나쁜 의도와 그릇된 신념에 의한 실천은 단호하게 경계해야겠지만,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 역시 세상에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디펜더>의 마지막 글귀를 기억해본다. ‘Don't Move, improvement!’


리뷰/[영화] 2009. 10. 27. 22:49

영화는 영화일 뿐 오해하지 말자 <굿모닝 프레지던트>






이것은 영화다.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대통령’이 등장하는 영화다. <굿모닝 프레지던트> 대통령과 국가와 국민이 등장하는 가장 정치적인 영화의 겉모습을 지녔지만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가진 한 인간’의 다양한 측면을 그린 휴먼 드라마이다. 아니 어쩌면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현실을 담은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연치 않다. 분명히 ‘영화’인데 현실을 기억하게 하는 장면이 참 많다. 복권 1등에 당첨되어 244억 원이라는 상금을 받게 된 대통령이 국민과 약속했던 기부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는 대통령을 통해 현실 대통령의 기부 문제가 생각나고, 위기에 처한 남북, 한일, 한미 관계를 정의롭고 현명하게 풀어가는 대통령을 통해 통일 문제를 평생의 과제로 삼거나, ‘반미면 어떠냐’고 도발하던 전직 대통령들이 생각나고, ‘시장에서 떡볶이 사먹는다고 서민을 위한 정치냐!’라고 묻는 대통령과 ‘시장에서 떡볶이 사 드시며 서민을 위한다고 용 쓰고 있는’ 어떤 대통령이 생각나고, 서민을 위한 부동산 정책을 도입하려다 정치적 스캔들에 휘말려 위기에 처한 대통령을 보며 현실의 정치판의 모형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해지기도 했다. 인격적인 대통령, 초절정 외모에 정의로움과 따뜻함을 갖춘 대통령, 소탈하고 섬세한 여성 대통령… 여태껏 우리가 만나보지 못했던 이상적 대통령을 제시하면서 ‘현실과 너무 다르지? 이것은 영화일 뿐이야’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알려주면서도 결코 현실과 분리시키지 않는다. 즉, 이것은 영화이되, 의도된 영화다.

 

 

현실을 배반하는 영화

한껏 힘을 빼고 착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그 허허실실한 농담과 착한 메시지를 통해 현실의 위선과 비루함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게 한다. 이 영화의 내용은 현실을 담되, 영화의 결말은 현실을 배반한다. 복권 당첨금 244억 원을 기부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던 대통령은 자신의 친인척을 이사로 세운 재단을 만들어 기부하는 흉내를 내는 ‘기부쇼’를 벌이던 현실의 대통령과는 달리 조용하고 소박하게 기부하는 방법을 택하고, ‘굴욕의 역사는 가지고 있지만 굴욕의 정치는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던 대통령은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방법으로 나라를 전쟁의 위기에서 구한다. 게다가 그 대통령은 현실의 대통령과는 달리 비쥬얼이 환상적이다(그럴리없겠지만 그런 대통령이라면 4대강 삽질을 한다고 해도 찬성하게 될 수도 있다). 정치적 스캔들에 휘말린 여성 대통령은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과감하게 그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전직과 현직 대통령인 세 명의 대통령은 서로를 존중하며 매우 친하게 지낸다. 현실과 달라도 너무 다른 결말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웃고는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엔 씁쓸함이 가득 차오르고, 영화가 끝나고 다시 현실로 발걸음을 옮기게 될 때 ‘저런 대통령을 가진 나라의 국민은 얼마나 행복할까’ 부러워지기까지 한다.

 

 

영화의 제목이 ‘굿 프레지던트’가 아니고 ‘굿모닝 프레지던트’인 이유

장진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이야기 한다. ‘국민은 행복한 대통령을 원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하기 힘들다. 오히려 '어떤 대통령이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대통령의 행복이 대다수 국민의 불행을 디딤돌 삼아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대통령이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그가 섬기겠다고 선언한 국민의 행복과 무관한 것이라면, 국민의 행복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 대통령이라면 그 대통령은 과연 행복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나는 감독에게, 그리고 지금 청와대 살고 계시는 그 분께 감히 묻고 싶어진다. 영화 속에서 전직 대통령들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나라의 어른으로서 적절한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며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났다. 저런 전직 대통령을 가지지 못한 우리의 현재는 과연 건강한 것일까. 거꾸로 가는 타임머신에 올라 탄 듯 멀미나고 답답한 지금의 현실은 과연 올바른 것일까? 나는 감히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영화 속) 저런 대통령이 아닌 (현실 속) 이런 대통령과 함께여서 행복하십니까?




주의 사항

1. 대통령이 시장에서 떡볶이를 드신다고 나랑 같은 서민이라 오해하지 말자.

2. 대통령 앞에서 방귀 뀌지 말자. 대통령 모욕죄를 징역살이 할 수도 있다.

3. 대통령에게 신장, 간 이식 수술해달라고 부탁하지 말자.

4. 대통령 비주얼이 왜 그 모양이냐고 한탄하지 말자.

5. 영화는 영화일 뿐 오해하지 말자.


리뷰/[영화] 2009. 10. 20. 17:13

지금은 '호우시절'입니까? <호우시절>



지금은 ‘호우시절’ 입니까?



춘야희우(春夜喜雨) -두보(杜甫)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堂春乃發生(당춘내발생) 봄이 되니 내리네

隨風潛入夜(수풍잠입야) 바람 따라 몰래 방에 들어와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소리 없이 만물을 적시네

夜徑雲俱黑(야경운구흑) 들길은 구름에 깔려 어둡고

江船火燭明(강선화촉명) 강 위에 뜬 배는 불빛만 비취네

曉看紅濕處(효간홍습처) 새벽에 붉게 젖은 곳을 보니

花重錦官城(화중금관성) 금관성에 꽃들이 활짝 피었네

 

 

‘꽃이 피어서 봄이 오는 것일까,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일까’

‘그 때 널 사랑한다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동하의 질문에 메이는 모호한 대답을 하며 살짝 웃는다. ‘그 때’라는 이름으로 설레었던 과거의 어떤 순간을 기억하는 일만큼 모호하고 쓸쓸한 일이 또 있을까. 내 인생의 어느 때쯤이 ‘호우시절’이었을까, 혹시 그냥 무심코 흘려보낸 것은 아닐까. <호우시절>은 그런 생각들로 인해 가슴 한 구석이 쓸쓸해지는 영화이다.

 

 

미국 유학 시절에 친구였었던 동하(정우성)와 메이(고원원). 동하의 중국 출장지에서 우연히 재회를 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지난 시간을 추억하는 두 사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만난 남자와 여자를 통해 소환된 시간에 대한 기억은 미묘하게 달랐다. 남자는 여자와 사귀었으며 키스도 했었고 자전거도 가르쳐주었다고 기억하지만 여자는 사귀지 않았으며 키스도 안했고 자전거도 탈 줄 모른다고 기억한다. 같은 시간에 대한 다른 기억을 마음에 새긴 두 사람은 ‘그 때’를 이야기하는 순간에 그저 허허로운 웃음을 짓거나, 안타까운 심정으로 서로를 보듬는다. 그들에게는 과거만큼 뜻밖에 찾아 온 현재라는 시간도 중요하다. 그러나 놓쳐버린 과거만큼 현재도 녹록치 않다. 남자와 여자. 사람은 같지만 헤어져있던 다른 시간이 남자와 여자를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자와 여자의 현재는 ‘사랑에 국경이 있읍디다’라는 지사장의 말을 굳이 듣지 않더라도 설레면서도 쉽게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다시 떠나보내야만 하는 것일까? 지금이 서로에게 ‘호우시절’인 것이라면 어떨까? 그 시절을 알아챘다면 어떻게 될까? 영화는 그런 미련을 가득 남긴채 앤딩크레딧을 올린다. 그리하여 <호우시절>은 내가 본 허진호 영화 중 가장 행복한 결말로 기억될 것이다. <호우시절>에는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눈물마저 흘릴 수 없었던 먹먹함도, <봄날은 간다>처럼 안타깝고 씁쓸한 엇갈림도, <행복>처럼 차가운 신파도 없다. 초여름과 여름을 지나며 기분 좋게 살금살금 내리는 비처럼 다시 찾아 온 ‘호우시절’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를 조용히 응원하게 된다.

 

 

<호우시절>은 나에게 허진호 감독을 다시 찾게 하고 정우성을 재발견하게 도와 준 영화였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내 인생의 영화 Best’로 꼽는 나에게 이 영화는 <외출>이나 <행복>에서 느꼈던 이질감과 아쉬움을 떨쳐내고 다시 사랑과 인생의 깊이를 담담하게 표현하는 내가 좋아하는 허진호 감독을 찾게 해 주었다. 그리고 정우성! 이 영화를 보고 누군가에게 이렇게 표현했다. ‘정우성은 점점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아’ 이제까지 정우성을 생각하면 결코 범접할 수 없는 눈부신 생물체가 떠올랐는데 구부정하게 혼자 쓸쓸히 걷고, 느릿하고 어눌하게 말하고, 호텔 숙소에 홀로 앉아 출장비를 뻥튀기 하고, 오랜만에 만난 여자 친구를 품기 위해 조바심을 내는 정우성을 보고 있노라니… ‘참, 바람직한 아저씨가 되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반가웠다.

 

 

정우성을 한 시간 반 동안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권하고 싶은 영화다.







리뷰/[영화] 2009. 9. 7. 18:10

<국가대표> 완결판 상영에 대한 생각

 

몇 주 전, 정기구독하는 <씨네21>에서 김용화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었다. 김용화 감독은 편집된 부분 중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어서 관객 400만이 넘으면 재편집한 내용으로 상영할 예정이라는 내용의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다면 관객이 조금 의아해 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장면을 이해하기가 더 쉬웠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지난 주에 <국가대표> 영화 감상문을 쓰면서 그 인터뷰가 생각났다. 400만이 넘었으니 다시 편집한 내용을 정말 상영하나? 그렇다면 다시 그 영화를 봐야하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오늘 인터넷 뉴스를 보니 다시 편집한 내용(일명 감독판)을 상영한다고 하여 논란이 되나보다. 논란의 주된 내용은 ‘그럼, 우리가 본 것은 미완성판이었나’ 혹은 ‘상술이다’로 압축되는 것 같다. 그런 의견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어찌되었든 감독은 그 영화의 ‘창작자’로서 가장 좋은 결과물을 내놓았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리고, 400만이 넘은 시점에서 영화의 인기가 사그러들지 않으니 이미 본 관객을 또 보게 하려는 심산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살 만한 여지가 충분히 있다.

 

하지만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다시 편집한 내용을 세상에 내보내려는 감독의 입장을 옹호하고 싶다. 첫째 감독은 최대한 관객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뜬금없거나 작위적으로 보여 관객과의 소통을 방해했던 부분에 대해 감독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소통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 속에서 많이 생략되었던 재복이와 아버지의 히스토리를 알 수 있다면
재복이가 올림픽에서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고 인터뷰했다던 뜬금없는 앵커의 코멘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창작자로서의 아쉬움과 자존심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과거에 작가를 지망하면서 글을 좀 써보니 내가 쓴 모든 글들은 모두 ‘내 자식’같이 여겨졌다. 남들은 ‘훌륭하다’고 말하여도 나 스스로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신경쓰여 고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쓴 글에 대한 애정이었고, 그 글을 쓴 창작자로서의 자존심 문제였다. 감히 예측하건데, 감독도 그런 마음 아닐까. 내가 만든 내 자식과 같은 작품을 조금 더 근사하게 만들어 세상에 내놓고 싶은 욕심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제작이란 것이 감독의 욕심과 별개로 타협하고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조금 늦게 세상에 내 놓게 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상술’에 대한 지적을 하는데, 상술 맞다. 상업 영화이므로 ‘상술’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다른 점은 ‘재편집 상영’은 개봉 이전부터 이미 이야기 된 점이라는 것이다. 그런점에서 정상참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영화가 ‘대중적 스포츠 영화’로서 미덕을 갖추었다고 생각하지만 ‘최고’의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보다 더 완성도있는 편집본을 통해 영화가 보여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보여주고 싶은 제작자와 감독의 마음을 환영한다.


덧붙임) 며칠 전 뉴스에 국내에서 국제 스키점프 대회가 열렸다는 뉴스를 봤다. 스키점프 선수들의 인터뷰와 응원하는 관중들의 모습을 보며 영화 한 편이 참 큰 일을 했구나 싶어 참 뿌듯했다. 하지만 뉴스 말미에 평창 올림픽 위원회 관계자의 인터뷰가 삽입된 것을 보면서 어쩌면 영화 속 그때처럼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부디, 하고 싶은 스포츠를 걱정없이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사치가 아닌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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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2009. 9. 4. 15:05

엄마와 딸은 피보다 '징하다' <애자>

 

우리 엄마는 200점짜리 엄마다. 엄마의 표현에 의하면 '첫째를 딸로 낳고, 둘째를 아들로 낳은 여자'는 200점짜리 엄마란다. 나는 그 200점짜리 엄마의 자랑스러운 첫째 딸이다. 엄마와의 사이는 그럭저럭 괜찮다. 둘 다 애교스러운 편이 아니어서 투박한 대화들이 오고가지만 서로에 대한 마음이 애틋하다는 것 쯤은 본능적으로 아는 사이다. 그러나 엄마와 나는 징글징글하게 싸운다. 가끔은 두 번 다시 보고싶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후벼 파서 상처에 굵은 소금을 쫙쫙 뿌리는 말들이 오고 가곤 한다. 싸울때마다 신기다하다고 느끼는 점은 싸움이 언제나 돌발적이라는 점이다. 다정다감한 대화가 오고간 지 10초도 안되어 ‘파이터’의 모습으로 돌변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 싸움의 끝은 언제나 승자가 없다. 엄마와 나, 둘 다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고 끝을 맺기 때문이다. 싸움은 시끌벅적하지만 화해는 은근스럽다. 격렬한 전투를 마치고 냉전 상태에 돌입했을 때도 슬쩍슬쩍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화해의 틈을 찾는다. ‘세탁기 돌릴테니까 빨래 내 놔’, ‘방에 모기 있더라’ 등의 소소한 말들을 몇 번 주고받다보면 어느새 픽- 하는 웃음과 함께 다시 다정한 모녀 사이가 된다. 아니,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휴전’ 상태에 돌입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언젠가 엄마가 죽는 꿈을 꿨다. 꿈 속에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꿈에서 깨어나서도 한동안 서러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꿈에서 깨어난 나에게 엄마가 왜 그러냐고 물어봤지만 비록 꿈이었지만 엄마와 죽음을 연관시켜 입 밖에 내기조차 싫어서 그냥 ‘무서운 꿈을 꿨어’라고만 대답했었다. 엄마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난 후부터 엄마의 건강 상태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앉고 일어설 때 ‘끙’하는 신음 소리만 내도, 날이 궂을 때 여기저기 쑤신다는 하소연만 들어도 내 마음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왜 하필이면 한여름에 태어나 엄마가 산후조리를 제대로 할 기회를 못 줘 엄마 몸을 상하게 했는지 왜 엄마는 태어날때부터 '엄마'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굴었는지 엄마가 점점 늙어가는 것이, 그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꼭 내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콕콕 아파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나의 속마음은 ‘신경질’로 표현되었다. 아프다고 끙끙거리면서도 내일 아침 반찬거리를 준비하는 엄마에게, 피곤하여 꾸벅꾸벅 졸면서도 밤 12시에 돌아오는 남동생을 기다리다 간식을 챙겨주고서야 잠이 드는 엄마에게, 세탁소에 수선을 맡겨도 될 옷을 기어코 당신 손으로 수선하느라 쭈그려 앉은 엄마에게 나는 화를 참 많이도 냈더랬다. 싸가지 없게 화를 냈지만 사실은 두려웠던 것이다. 엄마를 지치게 하는 그런 일상들이 조금씩 조금씩 쌓여 엄마를 생각보다 빨리 잃게될까봐 그래서 엄마 없는 텅 빈 세상 속에서 덩그러니 남겨질까봐 두려웠던가보다. 마치 그때 꿈 속에서 만났던 막막한 세상에서 처럼. 
생각해보니 엄마와 딸은 서로에게 가시같은 존재인 것 같다. 가슴에 콕 박혀서 찌르르 아프지만 때로는 상처도 나지만 도저히 빼낼 수 없는 가시같은 존재. 


<애자>는 엄마와 딸의 ‘가시같은 사이’를 참 짠하게 그려낸다. 엄마와 딸의 관계가 ‘징글징글’하지만 사실 그 관계에는 아빠도 형제도 남자친구도 끼어들 수 없는 ‘징한’ 사이이며 일상 속에서는 깨닫지 못했지만 사실은 서로가 서로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된다는 것을 엄마가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각인시켜 준다. 그래서 영화의 전반부에는 엄마와 딸의 징글징글한 관계가 그려낸 소소한 재미에 웃게되다가 죽어가는 엄마와 딸의 모습이 담긴 후반부에는 징한 아픔에 서러운 눈물을 쏟게 된다.


시한부 판정을 받고 서서히 죽음을 준비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도저히 보내지 못하는 딸의 이야기도 슬프지만 내가 눈물을 쏟았던 장면은 엄마가 죽은 후 엄마의 영정 사진 앞에 멍하니 앉아있는 딸에게 나타난 엄마의 영혼과 딸의 대화 장면이었다. 이미 세상의 모든 눈물을 흘리고 마른 뼈처럼 앉아있는 딸의 등을 토닥이며 ‘한동안은 허전할꺼야’라고 담담하게 위로하는 엄마의 말에
'엄마는 죽어서도 엄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딸처럼 눈물을 쏟아버렸다. 그리고, 떠나려는 엄마의 다리를 붙잡고 ‘조금만, 조금만’을 서럽게 외치던 딸을 보며 엄마를 잃고 서럽게 눈물을 흘리던 그 꿈이 기억이 생각나 내가 그 딸이 된 것 처럼 눈물을 쏟아버렸다. 언젠가는 엄마를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임을 알면서도 생각만 해도 서럽고, 아픈데 어떻게 ‘한동안은 허전할꺼야’라는 말이 위로의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엄마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내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 있을텐데 엄마 없는 세상을 어찌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영화가 엄마를 잃은 슬픔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그 엄마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모습까지 보여줘서 다행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너무 슬퍼서 그 영화관을 빠져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의 말처럼 '한동안은 허전하겠지만' 엄마의 분신인 딸이 멋진 남자 만나서 연애도 하고, 결혼해서 애도 낳고, 일도 열심히 잘하며 행복하게 살길 그곳에서도 간절히 바랄 것이다. 그것이 엄마가 내 곁에 있는 지금도,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덧니) 영화의 제목은 ‘애자’이지만 촌스러운 이름에 관한 에피소드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제목을 ‘애자’라 지었을까? 엄마는 딸을 ‘아가’라고 부른다. ‘애자’는 혹시 ‘사랑하는 자식’이라는 뜻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애자'가 아니라 엄마인 것 같다.


  • 모과 2009.09.04 22:44 ADDR 수정/삭제 답글

    [애자]를 보고 처음으로 딸있는 엄마가 부러웠습니다.
    트랙백 걸고 갑니다.

리뷰/[영화] 2009. 9. 3. 17:48

제목이 왜 국가대표일까?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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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스포츠 자체가 ‘각본 없는 드라마’인데 그것을 영화화 하면 너무 식상해지는 것 아닌가’라는 말을 하지만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는 언제나 재미있다. 이루어야 할 뚜렷한 목표가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건강한 열정이 있고, 그것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발생하는 좌절과 갈등을 통한 아픔과 성장이 있고,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하더라도 충분히 목표 이상의 감동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다. ‘스포츠’라는 날 것 그대로의 신선함을 유지시키되 그 날 것을 제대로 음미할 재료와 양념이 첨가된다면 우리는 더 휼륭한 요리를 누릴 수 있는 것이리라.


1996년 전북 무주.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해 스키 점프팀이 급조된다. 어린이 스키교실을 근근하게 운영하던 강사 박종삼(성동일)이 코치로 선임되고,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 해외 입양아 밥(하정우), 과거 스키 선수였으나 본드 흡입 사건으로 쫒겨난 경력이 있는 나이트 클럽 웨이터 흥철(김동욱 분),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살아온 고깃집 아들 재복(최재환 분), 할머니와 동생을 돌봐야 하는 짐이 버거운 말 없는 소년 가장 칠구(김지석 분), 그런 형을 끔찍이 사랑하는 4차원 동생 봉구(이재응 분)까지 모인다. 하지만 국내 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생소한 ‘스키 점프’라는 종목을 감당하기엔 모든게 부족한 상황이다.


영화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로 흘러가 훈훈하게 마무리를 한다. 그 속에 예상 가능한 뻔한 스토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유머도 반짝이고, 가슴 뭉클한 사연도 살짝 숨어있다. 그리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스키 점프 장면에서는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하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스포츠 영화가 안겨줄 수 있는 짜릿한 열정과 감동을 충실하게 안겨준다. 하지만, 그 감동을 반감시키는 불편한 요소도 있었다.


김용화 감독의 전작 <미녀는 괴로워>를 보았을 때다. 만족스럽게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마음은 계속 찜찜했다. 그 찜찜함이 무엇일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결국 이뻐진 것은 사실이잖아’ 그랬다. 전신 성형을 받았던 과거로 인해 위기에 빠졌던 주인공이 그 사실을 고백한 후 관객의 우레와 같은 격려를 받으며 콘서트를 무사히 마치는 장면은 물론 감격스러웠지만 결국 ‘예쁜 여자’에 대해 사회적 편견이나 남성적 판타지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인채 흐지부지 마무리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영화는 내 마음속에 그 영화는 ‘흐지부지 휴머니즘’으로 각인되었다.


<국가대표> 또한 그랬다. 어려운 역경과 국가적 무관심을 뚫고 올림픽에 출전하여 (비록 실패했지만) 눈부신 성과를 보여 준 장면은 너무 감격스러웠지만, 메달 획득에 실패한 후 락커룸에서 태극기를 걸어놓고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이나, 아버지와의 애틋한 스토리가 딱히 없었던 재복이 사실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고백했다던 해설자의 멘트는 ‘뜬금없음’을 뛰어 넘어 스포츠 영화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비장한 애국심, 가족애 등을 개연성 없이 삽입하여 감동을 이끌어내려는 것만 같아 마음이 살짝 불편했다.


그리고 뜬금없지만 실제로는 어머니가 버렸지만 사실은 그 어머니가 아이를 입양시키도록 방치한 국가에 다시 돌아와 한국인이 되는 밥, ‘대한민국’이라는 국적으로 출전하였지만 정작 그 대한민국은 자신들을 위해 아무 지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감격스럽게 애국가를 부르던 선수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선수협회나 국가적 지원은 전무하다는 실제 이야기 등을 통해 국가라는 존재, 그리고 국민이라는 존재에 대해 고민을 해보게 되었다. 제목이 ‘국가대표’인것도... 흠... 



스포츠 영화지만 입체적으로 보자면 참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영화였다.


결론은... 하정우♡

  • flacamo192 2009.09.05 22:37 ADDR 수정/삭제 답글

    하정우를 위한 영화죠. ^^;;;

    '국가대표'는 지상파에서 방영되긴 좀 힘들지 싶어요.
    김동욱 대사의 대부분이 쌍욕이라... -_-;;

리뷰/[영화] 2008. 11. 5. 11:23

사랑이라는 이름의 현실 <사과>

 

 

사랑이라는 이름의 현실 <사과>

오랜만에 혼자 영화를 봤다. 비오는 10월의 마지막 날 광화문 '씨네큐브' 오후 4시 30분 영화 <사과>
 

사과 vs 사과

영화 <사과>를 처음 알게 된 건 4년 전 <씨네 21>을 통해서였다. ‘문소리, 7년 사권 애인에게 채었다’라는 카피와 함께 클로즈업된 문소리 사진이 새롭기도 하고, 어떤 사연인지 궁금하기도 하여 ‘개봉하면 봐야지’하고 기억해뒀더랬다. 그런데, 그 이후로 개봉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포스터도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그로부터 4년 후, <사과> 개봉소식이 들렸다.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의 소식을 들은 것처럼 반가웠다. 그런데, 어라? 친구가 조금 변했다. 일단, 포스터가 바뀌었다. 문소리를 원톱으로 내세웠던 포스터는 4년 사이에 '뜬' 남자주인공 이선균과 김태우를 함께 내세웠고, 카피도 ‘사랑이란 같은 곳을 보고있다 착각하는 것! 사랑이란 마주보며 딴 생각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생활스캔들’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4년전 포스터와 카피가 훨씬 맘에 든다. 듣자하니, 결말도 살짝  바뀌었다는데... 어쨌든, 익숙하지만 낯선 영화다.

 

사랑, 드라마틱 vs 리얼리즘

오랫동안 ‘연애질’을 쉬었더니 나에게 사랑이란 TV 혹은 친구나 후배들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된 ‘드라마’이거나 ‘인간극장’이다. 그리하여 종종 내가 실제로 사랑을 하게 된다면 ‘드라마틱’과 ‘리얼리즘’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며 극복할 수 있을까?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사과>는 ‘사랑이란 지독한 현실’임을 무덤덤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7년을 사귀었으면서도 여전히 애인과의 만남이 설레는 현정(문소리)은 어느날 갑자기 ‘내가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라며 이별을 통보하는 애인 민석(이선균)에게 허무하게 채인다. 실연의 아픔... 그리고 다시 찾아온 사랑, 상훈(김태우). 민석과의 만남처럼 설레지는 않았지만 편안한 느낌이 들었던 남자 상훈과 현정은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누가 그랬던가. ‘결혼이란, 그 당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것’이라고. 현정의 경우, 정말, 그랬다.


그렇게 시작된 결혼 생활. 그들의 결혼 생활은 안정되고 무난하게 흘러가고, 그런 일상에서 상훈을 향한 현정의 마음은 더욱 살갑게 발전되어 갔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과 그 일상의 무심함에 답답함을 느낀 상훈은 자청하여 구미 공장으로 파견근무를 떠난다. 그리고 시작된 오해와 갈등... 사랑하는 방식과 관점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 의해 사랑은 조금씩 어긋나고, 갈등을 유발한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첫사랑 민석과의 만남… 현정은 결국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런 내용을 품고 담담하게 흘러가는 영화이다.


누군가는 지루해 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나는 결코 지루하게 보지 않았다. 이 영화의 미덕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만들어진 이야기답게 굉장히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즉, '드라마틱'이라는 포장지로 포장하여 보여주기 보다는  어쩌면 '리얼리즘'이라는 투박한 그릇에 담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너무 평범하여 가끔 탈출하고 싶은 관계, 너무 가까워서 소중함을 알지 못했던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며 현정의 대사처럼 ‘열심히 사랑했다고 생각했지만 노력은 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돌아보며 반성하게 한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아주 많이 사랑했던 남자와 결혼하여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남자와 한 공간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겨울 날이 온다면 어떻게 할까. ‘부부란 사랑이 아닌 정으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까. 살면서 한남자만 바라볼 자신이 있을까. 사랑은 사라지는 걸까, 단지 변하는 걸까. 그런 사랑의 변화를 긍정할 수 있을까. 그 사람에 대한 내 사랑은 100%일까? 여전히 사랑을 쉬고 있는 노처녀는 사랑에 대해, 결혼에 대해 참 생각이 많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스무살 때 대책없이 품었던 ‘드라마틱한 사랑’을 더 이상 꿈꿀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걸 아는 사람에게 이 영화, 은근히, 쓸쓸하다. 


<사과>라는 제목의 의미

'영화의 제목이 왜 하필 <사과>일까?' 내 뒷자리에서 영화를 보고 있던 사람이 속삭였다. 그러고보니 <사과>라는 제목이 다소 쌩뚱맞다. 그런 궁금증은 영화를 보면 풀린다. 영화속에서 사과는 '두번'등장한다. 한번은 실제 사과, 한번은 상대방에 대한 사과의 말을 통해서. 내 나름대로 생각해본 제목의 의미는 이렇다. 사랑이란 결국, 스스로를, 상대방을 긍정하며, 받아들이는 지난한 과정이며, 그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은 '반성'이 아닐까... 라는. 그냥,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다^^


 

덧붙임
1. 등장인물 크레딧 속의 ‘주진모’는 그 ‘주진모’가 아니다.

2. 이선균은 감성적이면서 갈팡질팡하며 우유부단한 캐릭터를, 김태우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류의 지극히 현실적이며 무기력한 일상인 캐릭터를 참 잘 소화하는 것 같다.

3. 의외의 재미는 ‘현정 가족’으로부터 나온다.

  • 늦달 2008.11.07 02:23 ADDR 수정/삭제 답글

    연애질을 쉬었다는 표현이 참 별나게 다가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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