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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15. 4. 3. 00:33

[주간경향][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삼류 똥통 학교 다니는 주제에"

"삼류 똥통 학교 다니는 주제에!"

대학교 1학년 때였나, 나와 격하게 싸우던 동생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동생은 부모님께 '뒤지게' 혼나고 눈물 뿌리며 사과했지만 삼류. 똥통. 이라는 말은 한동안 내 마음에 철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동생은 모두가 인정하는 '모범생'이었다. 부모님은 명문대를 다니는 동생과 나를 차별하지는 않았지만 구분은 하셨다. 누군가에게 동생을 소개할 때 "OO대 차석으로 합격"이라 소개했고, 나를 소개할 때는 "문예창작학과 다니는데 나중에 작가 될 거“라 소개했다. 다니는 학교 이름을 굳이 소개하는 것과 애써 하지 않는, 애매한 차이를 눈치채버렸지만 서운해 하지는 않기로 했다.

날씬한 사람과 뚱뚱한 사람의 차이를 아는가? 날씬한 사람은 티 쪼가리에 바지만 입어도 멋이 나지만 뚱뚱한 사람은 가리고 싶은 곳이 많아 옷을 고를 때 마음이 복잡해진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기준'에 의해 보잘것없다고 판단하면 자신을 설명하는 말들이 길어지는 법이다. 나에 대한 부모님의 설명이 길어졌던 것처럼. 누구는 학교 이름만 말해도 그 인생이 설명이 되지만(때로는 굳이 자신이 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알아서 설명해준다. "얘 S대 다녀"), 어떤 인생은 긴 설명이 필요하다. 나도 그랬다. "어느 학교 나왔어요?" 라는 질문을 받으면 내가 왜 굳이 그 학교를 갔어야만 했는지, '고1때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한 달 동안 학교를 못 가 중간고사 전 과목 빵점을 받고, 내신을 망치고 슬럼프에 빠졌다가 내가 가고 싶었던 과를 가기 위해 그 학교를 택했으며…' 라는 길고 긴 이야기를 '변명'처럼 주렁주렁 늘어놓아야 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를 설명할 때 굳이 '학교'를 밝히지 않게 되었다. '나를 판단할 수 있는 선이해의 단서를 최대한 없애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기도 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꿀리기' 싫었다.

그래도 삼류든, 똥통이든 '학번'이라는 이름표를 가진 사람은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예전 다니던 직장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던 중 결혼하여 육아에 전념하다가 입사한 동료가 있었다. 배울 점 많은 사람이었다. 그 동료와 함께 지내며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너무 당연하게 "몇 학번이세요?" 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을. 대학 진학률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분명 대학 진학을 선택하지 않은 삶도 있을 텐데 우리는 어쩌자고 "몇 학번이세요?"라는 질문을 그리 당연하게 던졌던가. 상대방이 "저 대학 안 나왔는데요"라고 대답하면 왜 당황했던가. 학벌과 스펙이 '낙인'이고 극복하기 힘든 '계급'이 된 사회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얼마 전, 엄마와 심하게 다투었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감정들을 표창처럼 던지며 싸웠다. 내 인생에 대한 엄마의 총체적 평가는 이랬다. "네가 잘못해서… 노력 안 해서…" 서툴고 부족할지라도 최선을 다한 인생이라 생각했는데 나를 사랑하는 이의 냉정한 평가를 들으니 내 소중한 무엇이, 단단하게 지켜온 한 부분이 휘청거렸다. 어떤 인생인들 잘못이고, 노력을 안 한 결과라 할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우리 인생이 보잘것없는 것일까. 누가, 무엇이, 우리 인생을 그토록 보잘것없게 만드는 것일까.

누군가의 인생을 판단하거나 '일잘'과 '일못'으로 구분할 때 알게 모르게 촘촘하게 깔린 덫을 본다. 누군가에게는 그것 덫이 학벌일 수 있겠고, 어떤 사람에게는 경험일 수 있겠다. 어쩌면 모양 틀처럼 사회적 기준을 만들어 놓고 틀 밖의 인간들을 소외시키거나 배제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사회 자체가 덫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덫에서 탈출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때때로 과거 어느 순간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그 해 그 시험이 정말 내 인생을 보잘것없게 만든 것일까. 나는 정말 잘못했던 것일까.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어서 여전히 '일못'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가만히 고개를 저어본다. ‘네 잘못 아니야. 보잘것없지 않아. 충분히 예뻐’라고 나에게, 오늘도 최선을 다했으나 '일못'이어서 슬펐을 누군가에게 말해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지금은 이것뿐이어서 곤란하다.


기고 2015. 4. 3. 00:31

[주간경향][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나의 칼퇴를 막는 이 누구인가?"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오늘도 나는 모두 퇴근해 텅 빈 사무실을 나오며 중얼거렸다. 원래는 "회사(학교) 다녀오겠습니다."가 바른 용례일지 모르나 적어도 나의 경우는 반대로 쓰인다. 하루 24시간 중 집에 머무는 시간이 평균 10시간 정도인데 그마저도 취침 포함 시간이니 "우리 집에는 하숙생이 한 명 있다."는 엄마의 판단은 지극히 옳다. '칼퇴(칼퇴근)'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다. 우리는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권리가 있고 나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칼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칼'같지 않다. 세상 어딘가에는 나의 '칼퇴'를 막는 세력이 존재하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각종 웹사이트 해킹이나 정보 유출 사건 등 국내에서 벌어지는 굵직한 사건은 언제나 '북한 소행'으로 밝혀졌다. 이 음모론은 마치 '굶으면 배가 고프다.' 혹은 '출근하면 퇴근하고 싶다.'라는 표현처럼 지극히 쓸모없는 가설이 된지 오래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내가 '일못(일 못하는 사람)'인 이유도 '북한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나는 비겁하게 북한을 거론하지 않겠다. 그렇지 않아도 나를 '일못'으로 만들어 '칼퇴'를 막는 이유는 널렸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다. 어느 날 모 은행을 방문하여 통장 거래를 시도했는데 은행 직원은 통장 마그네틱선이 손상되어 거래할 수 없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주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나는 어제까지 멀쩡하게 사용하던 통장이 왜 하필 오늘 먹통이 되었는지 물었지만 그것이 어디 은행 직원 탓일까. 결국 시간을 홀랑 까먹고 야근을 했다. 다른 은행에서도 공인 인증서를 갱신하기 위해 홈페이지에 접속했다가 반나절을 날린 경우도 있었다. 어디 이 뿐일까. 사회 곳곳에 암약하다가 툭 튀어나오는 '일못'으로 인해 나도 덩달아 '일못'이 되어 사이좋게 서로 벙글거리며 웃다 헤어진 적도 많다. 신경림 시인의 책 제목처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정겨운 법인가 보다.

'일못 음모론'의 최고봉은 역시 공공의 적 '엑티브엑스'가 아닌가 싶다. 대부분의 공공 기관 홈페이지나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하려면 컴퓨터에 정체모를 프로그램을 깔아야 한다. 송금이나 결제 따위의 단순 업무와 이 복잡한 프로그램이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궁금하지만 물어볼 수 없다. 며칠 전에 깔았던 프로그램을 왜 또 깔아야 하는지 따질 수도 없다. 그저 프로그램을 설치하겠냐는 물음에 그 흔한 밀당이나, 저항조차 하지 않고 순순히 '예' 버튼 누르기를 무한 반복하는 '예스맨'이 되어야 한다. 그런 보람도 없이 결국 실패하면 기계에게 농락당한 기분마저 들기도 한다. 혼자 해결하겠다고 버둥거리다가 컴퓨터를 잘 아는 동료에게 물어봤을 때 "껐다 켜세요."라는 한마디를 핀잔처럼 전해 듣거나 내 손에서는 고집스럽게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그 동료가 손만 댔을 뿐인데 '모세의 기적'처럼 스르륵 해결되는 경험을 하게 된 날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만 빼놓고 소풍가버린 날 같다.

괜찮다. 다 괜찮다. 주어진 업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얼마든지 '예스맨'이 될 수 있다. "엑티브엑스 만든 놈 누구야!!!"를 백만 번쯤 외치다 보면 언젠가는 웹페이지가 열리리라는 '신앙'으로 버틸 수도 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과연 내가 '일못'이어서 생긴 결과일까? 며칠 전에는 접속한 웹사이트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국 상담원과 연결하여 원격 지원을 받아 약 한 시간 만에 문제를 해결했다. 알고 보니 시스템 문제였고, 나는 결국 야근을 했다. 이런 경우 야근을 하게 된 나는 '일못'인건가? 어떤 사람을 '일못'과 '일잘(일 잘하는 사람)'로 구분하기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촘촘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고, 지극히 복잡한 시스템에 우리 스스로를 맡겨버렸기 때문이다. 미국에 본사가 있는 페이스북 오류가 발생하면 다른 나라의 누군가는 '대략 난감' 상태가 된다. 반대로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어떤 작은 일이 어느 나라에서는 큰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일못'인지도 모를 일이다. '북한 소행'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우겨보고 싶)다.

오늘도 나는 '일잘'을 꿈꾸었으나 (거대한 음모로 인해) 실패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텅 빈 사무실에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야근을 하다가 뿌듯한 마음으로 컴퓨터를 끈다. 아뿔싸. 하필 오늘 같은 날 컴퓨터는 (시키지도 않은) 시스템 업데이트를 시작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기고 2015. 4. 3. 00:19

[주간경향][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아내를 드립니다"

일명 '땅콩 회항'으로 유명한 조현아씨가 구속되던 날, 그의 동생인 조현민씨는 언니에게 '반드시 복수할거야'라는 문자를 남겼다. 이 사실이 알려지며 비난을 받자 그는 SNS에 사과 글을 올렸다. 그런데 그 중요한 글에 오타를 냈다. '변명'이라 써야 하는데 '변멍'이라 쓴 것이다. 조현민씨의 오타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과거 '명예훼손'을 '명의회손'이라 하여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겼던 인물이다. 뭇 사람들은 그의 오타를 두고 무식하다, 사과에 성의가 없다 비난하지만 나는 오타 문제로 그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는 지독하게 '일 못하는 사람(일못)'이기 때문이다.

“정신 차리고, 성의껏, 똑바로 안할래?”

언젠가 중요한 문서에 오타를 낸 나에게 선배가 외쳤다. 그렇다. 오타를 낸 ‘일못’은 결과적으로 정신과 성의와 최선을 상실한 인간으로 취급될 뿐이다. 능력과 결과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사회에서 오타란 ‘일못’ 을 증명하는 낙인이 된다. 하지만 억울하다. 그것만으로 나의 정신과 성의와 최선은 그렇게 간단하게 무시당해도 괜찮은가? 결국 나는 ‘오타’같은 존재였던가? 세상의 모든 ‘오타’ 혹은 ‘오타 같은 존재들’은 나쁜건가?

세상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자나 깨나 부르짖는 '창조 경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일못'들이다. ‘일못’들은 조현민씨는 명함도 못 내밀 희귀한 오타와 이면지를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창조적 인간들이다. 어이없는 오타 창출은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주어 명랑 사회를 선도하고, 그 오타의 결과로 생산된 이면지는 지류, 컴퓨터 소모품 등 국/내외 산업 활성화에 기여한다. 게다가 ‘일못’들은 지극히 이타적인 사람들이다. 자신의 '일못' 행위를 통해 동료의 자존감을 높여준다. 조현민씨만 하더라도 ‘뉴스'를 창조하여 언론사 및 각종 웹사이트 클릭 증가를 유도하였으며 두고두고 회자될 ‘이야기’를 생산하느라 살신성인하였으니 얼마나 창조적이고 이타적인 인간인가.

그러므로 나는 예리한 칼날처럼 나를 스치며 자존감을 베었던 무수한 오타들과 '일못'이었던 순간들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리고 싶다. '반전 평화'여야 하는데 '반 평화'라고 인쇄된 책을 끌어안고 통한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선배의 귀한 출산 소식을 전하며 '득녀'를 '득년'이라고 써서 본의 아니게 패륜 후배가 되었던 기억, 단체 대표 이름 중 한 글자인 '희'를 '싀'로 써서 졸지에 세상에 없는 문자를 창조했던 기억, 행사 신청하신 분께 '안내'를 드려야 하는데 '아내'를 드린다고 하여 경악했던 기억, '2003년'에 무려 '20003년' 연간 보고서를 미리 만들었던 기억… (지면 관계상 이쯤에서 멈춰야 할 것 같다.) 돌이켜 보니 오타를 발견하고 가루가 되도록 까이던 순간들이 결코 짠내와 땀내만으로 기억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는 ‘일못’이었지만 그 과정에 깃들었던 그 시절 나의 정성과 최선, 뜻하지 않은 살신성인으로 인해 모두 함께 낄낄거릴 수 있었던 추억으로도 기억되기 때문이다. 그런 추억 하나 간직하지 못한 ‘일 잘하는 사람(일잘)’들은 얼마나 불쌍한 존재들이란 말인가. 어쩌면 일못들은 치열하고 각박한 세상에서 작은 숨구멍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그런 숨구멍 하나 용납하지 못하는 세상이란 얼마나 슬픈 곳이란 말인가.

오늘도 나는 ‘오타’를 방지하기 위해 봤던 글을 보고 또 보며 고치고, 또 고친다. 그것이 내가 보일 수 있는 정성이요, 최선이라 생각한다. 그래봤자 결국 오타는 필연이요, 운명이다. '오타'에 대해 쓴 이 글에서도 오타가 암약하고 있었으므로 함께 원고를 점검했던 '일못'들에게 타인의 글에서 오타를 발견하는 짜릿한 쾌감과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그러므로 나는 만족한다. “오타낸 사람 함부로 비웃지 마라. 당신은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즐거운 사람이었느냐.” 




기고 2015. 4. 3. 00:16

[복음과상황]드라마보는여자:'피노키오'가 던지는 질문들

[복음과상황] 드라마 보는 여자 2015년 3월호



사람들은 그를 '행운의 사나이'라 불렀다. 현재 '나라꼴'이 말이 아니게 된 이유는 그가 모든 행운을 가져가버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 '행운의 사나이'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고 얼마 전 세상에 회고록을 내놓았다. 그가 추진했던 사대강 사업, 자원 외교 등을 둘러싼 논란이 '현재진행형'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800쪽에 이르는 그 책은 '자화자찬' 일색이었다. 어쨌든, 그 '행운의 사나이'는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으니 스스로라도 칭찬하자 굳게 다짐한 듯했다. 세상은 그 책을 빗대어 '대통령의 시간'이 아니라 '사기의 시간' 또는 '자서전'이 아니라 '(범인의) 자술서'라 일갈했지만 나의 판단은 다르다. 사실, 그는 '피노키오 증후군(Pinocchio Syndrome)' 환자인 것 같다. '피노키오 증후군'이란 본디, 거짓을 말하면 딸꾹질 증상이 나타난다지만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어버리면 그 말이 아무리 거짓이어도 딸꾹질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거짓말을 해도 코가 자라지 않는 동화속 피노키오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그 책을 통해 스스로 밝힌 사대강 사업에 대해 "(세계적 금융 위기 중) 4대강 살리기 사업은 환경 개선과 경제 위기 극복을 한꺼번에 만족시키면서 적시에 추진될 있었다."는 평가나, 한미 쇠고기 협상과 촛불 집회에 대해 "어청수 경찰청장에게 '시위대가 청와대에 들어오는 일이 있더라도 인명 피해가 있으면 절대 안 된다. 국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대처해달라'고 당부했다."는 평가는 '진실'일 확률이 높다. 적어도 그의 의식 세계에서는 말이다.

대통령(이었던 사나이)도, 뉴스 앵커들도 더이상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너무 멀쩡하게 '뻥'을 치므로 "저것은 거짓말!"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도리어 '죄인'이 되어버리는 세상이다. 우리가 어쩌다 이런 세상을 살게 되었는지 도무지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난감하다. 얼마 전 종영한 <피노키오>는 진실이 전복되고, 언론이 스스로 '기레기'가 된 세상을 잘 보여주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질문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는 드라마였다. <피노키오> 속 등장인물들의 고민은 지금, 우리의 고민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피노키오> 를 다시 소환하여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질문들을 던져보자.


첫 번째 질문 "당신이 진실이라고 믿고 말하는 것이 정말 진실인가?"

<피노키오> 줄거리의 뼈대를 이룬 '기호상 사건'이 한 가정의 몰락이라는 비극이 되어버렸던 이유는 양심을 팔아버린 기자, 송차옥(진경)때문이기도 했지만 '기호상이 살아있다!'라고 믿고(결국 그의 착각이었지만 그는 확신했다) 증언한 피노키오 증후군을 앓고 있는 '대중'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결과로, 언론은 그 대중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것이었고 대중 역시 그 언론에 휩쓸려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렸다. 지금 우리 모습과도 닮지 않았는가?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찬찬히 들여다보기보다는 화르륵 쏠려 버리거나, 분노를 편리하게 전가할 희생양을 만들어 버리거나, 편을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과연 진실을 알기 위해 얼만큼의 노력을 하며 살았던가,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말하는 것은 정말 진실인 걸까? 우리는 의심하고 질문할 수밖에 없다. 지난 해 '세월호 참사'를 통해 적어도 말의 책임, 진실의 무게를 고통스럽게 체감했던 우리였기에 더더욱 그래야 한다.


두 번째 질문 "송차옥 기자와 다르고, 박로사 회장과도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가?"

송차옥 기자의 (악의적) 보도로 가족을 읽은 기하명(이종석)이 끊임없이 추구했던 것은 '송차옥 기자와 다른 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서범조(김영광) 역시, 언론을 조종하는 권력자이자, 어머니인 박로사 회장이 일궈놓은 인생이 아닌, 다른 방식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과제였다. 대부분의 드라마는 크게 보면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문제로 환원된다. 이를테면 부모 세대에서의 원한이 자식 세대의 비극으로 이어진달지, 부모 세대에 정해진 '계급' 문제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자식 세대의 '계급'적 갈등이랄지 이런 식인데 <피노키오> 에서는 이 문제를 지혜롭고 진보적으로 풀었다. 기하명이 부모 세대에서 비롯된 원한을 같은 방식으로 풀지 않고 '기자 기하명'이라는 공적인 방식으로 풀어냈던 점이나 최인하(박신혜)와 서범조가 각각의 어머니를 '사랑'하면서도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풀어냈던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우리는 '부모세대'라 할 수 있고, '불위한 체제'라 부를 수 있는 과거와 현재가 가진 모순에 대해 각성하되, 송차옥 기자나 박로사 회장와 다른 길을 선택하며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 


세 번째 질문 "질문의 유통 기한은 언제까지인가?"

비슷한 시기에 방영했던 <오만과 편견>이 그랬듯 <피노키오>도 과거의 사건을 잊지 않고, 집요하게 파헤치는 내용이다. <오만과 편견>의 한열무(백진희)는 15년 전 동생이 유괴되어 사망한 사건의 '진짜' 범인을 찾기 위해 검사가 되고, <피노키오>의 기하명은 '진실'을 밝혀 복수를 하기 위해 기자가 되었다. 그들은 그 과정을 통해 자신들이 경험한 비극이 사실, 악한 인간들이 촘촘하게 짜놓은 권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앞에 개인들은 때론 무력했고, 길을 잃은 듯 했다. 그래서 도리어 치열하게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한열무 감사는 선배인 구동치(최진혁) 검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넓은 세상에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하고 우리 엄마 밖에 없어요. 아이가 죽는다는 건 그래서 억울한 거예요. 기억해 줄 사람이 너무 없어서. 죽어서 묻힐 수 있는 것이 엄마 가슴 밖에 없어서. 누군가의 힘 때문에, 욕심 때문에, 무책임 때문에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누구 책임인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면, 그럼 너무 가엽지 않아요?라고. 기하명 기자는 이렇게 다짐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아직 물어볼게 너무 많거든."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수많은 비극 앞에서 질문의 유통 기한은 언제까지인가? 세상 모든 질문에는 유통 기한이란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굳이 필요하다면 '진실이 밝혀지는 때'일 것이다. 그래야 권력을 가진 그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고, 무엇을 은폐하려 하는지 질문하고,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회고록을 낸 '행운의 사나이' 이야기를 해보자. 자기 기억 속에서는 가장 열심히 살았고, 성공했고, 행복했다고 믿는 사람이 세상을 얼마나 위험에 빠트릴 수 있는지, 우리는 그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제대로 질문하지 않으면, 그 질문들을 통해 진실과 거짓을 온전히 분별할 수 없다면 그 책 내용은 '진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정말 무섭지 않은가? 지금 우리에게는 '피노키오의 딸꾹질'이 필요하다.




기고 2015. 4. 3. 00:12

[복음과상황]드라마보는여자:'갑'들의 드라마

[복음과상황] 드라마 보는 여자 2015년 1월호


'갑'들의 드라마

어떤 남자가 있다. 어린 시절 누군가의 음모로 사고를 당해 부모를 잃고 방황하다가 우연히 다른 가정에 입양되어 성장한다. 사고 후유증으로 '상심 증후군'을 앓게 된 그는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를 만나지도 못한 채 천재적 실력으로 레스토랑 컨설팅 회사 '레스토랑의 신' 경영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기구한 사연을 가진 여성과 얽히게 되며 그녀의 도움으로 '상심 증후군'을 극복한다. 드디어 만난 할머니는 종편 HBS를 소유한 위너그룹의 '오너'였고, 그는 위너그룹의 '사라진 황태자'였던 것이다. 위너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그는 단박에 위너그룹 계열사인 '위너 푸드'의 사장이 된다. 그의 이름은 한태희(주상욱). 드라마 <미녀의 탄생> 남자 주인공이다. 원래 위너그룹 차기 대표이사는 차곡차곡 실력을 쌓으며 그룹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온 한태희의 배다른 형, 한민혁(한상진) 기획실장의 몫이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정통 혈육'이 아닌 '서자'였다. 드라마를 시청하지 않는 독자도 이미 눈치 챘겠지만 드라마는 한태희 편이다. 한민혁은 한태희가 '가업'으로서 위너그룹'을 물려받는 과정을 방해하는 악인일 뿐이다.

'계급'이라는 사회적 서사를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장르는 아마 드라마일 것이다. 우리는 드라마가 설계하는 서사에 따라 자본과 권력에 의해 형성된 계급 사회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공정한 절차 따윈 무시하는 계급적 대물림을 긍정한다. 시청자가 열광하는 드라마 줄거리는 대부분 상/중/하층 계급의 사랑, 욕망, 배신, 복수의 장치들이 조미료처럼 섞여있는데 드라마 속 재벌 2세나 3세들은 대부분 사이코패스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상처도 많고, 알고 보면 착한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깊이 이해한다. 그동안 <파리의 연인> 한기주(박신양)를, <발리에서 생긴 일> 정재민(조인성)을, <시크릿 가든> 김중원(현빈)을, <꽃보다 남자> 구준표(이민호)를 그런 이유로 지지하거나 사랑해왔다. 마찬가지 이유로 <미녀의 탄생>에서 그룹에 대한 아무런 이해나 경험이 없는 한태희가 공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단지 직계 혈통이어서 하루아침에 그룹 계열사 사장이 되는 현실을 비판하기 보다는 그의 사랑을 지지하고, 그가 다시 가문의 영광을 누리도록 응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우리가 겪는 현실을 깜빡, 잊어버리곤 한다.

'을'들의 잔혹사

2014년 한 해를 뜨겁게 마무리한 단어는 '갑'이라는 단어였다. 원래 유명했던 단어였지만 2014년을 거치며 그 단어는 우리 사회를 가장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드라마를 비롯한 대중매체가 상류 계급(슈퍼 갑)을 미화하여 선망하게 하는 방식으로 계급 문제를 왜곡하거나 은폐했다면, 현실은 날것 그대로의 계급 문제를 드러내주었다. 대리 점주에게 물건 떠넘기기를 했던 남양유업, 비행기 기내식을 빌미로 승무원을 폭행하여 '라면 상무'라는 별명을 얻게 된 포스코 상무, 골프장에서 캐디를 성추행하여 물의를 빚은 박희태 전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급기야 비행기를 후진시킨 '땅콩 회항' 사건의 주인공인 대한항공 부사장에 이르기까지 최상급으로 '후진'하는 '갑'들 덕분에 우리는 비로소 계급 문제를 제대로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계급 문제를 직면하게 되었다고 하여 해결 방법을 찾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 드라마 <미생>의 대사처럼 세상은 이미 '갑과 을'의 대결이 아닌 '을'들의 처절한 전쟁터이자 지옥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갑'들이 공중에서 '지랄'할 때, 어떤 '을'들은 공중에 올라 쌍용 자동차 해고 무효 소송 판결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들이 발을 디디던 땅은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에 너무 무기력한 탓이었다. <미생>속 장그래(임시완)가 아무리 뛰어나도 '원인터네셔널'같은 사회에서 그는 언제나 비정규직일 수밖에 없고, 장백기(강하늘)의 스펙이 좋아봤자 '금 수저 물고 태어난 낙하산'들을 당해낼 수 없다. 조현아 부사장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던 대한항공 사무장은 인터뷰때 이런 말을 했다. "제가 감히 오너의 따님인 그 분의 말을 어길 수 없었습니다." 최근 발표한 <한겨레> 조사에 따르면 국내 주요 재벌 그룹 3세들의 입사 나이는 평균 28.1세이고, 첫 임원 승진 나이는 평균 31.2세라고 한다. 즉 입사에서 임원 승진까지 약 3년 남짓 걸리는 셈이다. '갑'들이 촘촘하게 디딘 땅에서 '을'들이 디딜 틈이란, 쪼가리만한 광장 한 모퉁이, 위태로운 허공뿐이었다. 그마저도 임시거나, 불법 체류 신세다.

다시 시작하는 ‘연대’

'을'들이 연대하여 '갑'들에 저항하면 우리 사회의 계급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우리는 사실 '갑'을 욕망하는 '을'이거나 나보다 약한 누군가에게 반드시 '갑'으로 존재해야만 비로소 안심하게 되는 비루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손님이 식당 종업원에게, 고객이 감정 노동 종사자에게, 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노인이 청년에게, 남성이 여성에게 우리는 언제든 누군가에게 상대적 '갑'이 될 준비가 된 사람들 아닌가? 인식과 현실의 어긋남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을’들의 연대는 불가능하다.

드라마 <미생>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안영이(강소라)의 직장 상사인 정과장이 어느 날, 권위적이며 폭력적 행동을 해오던 마부장의 손을 막으며 단호하게 말한다. "이제 저희 몸에 손대지 말아주십시오." 용기를 낸 정과장 곁에는 그의 동료들이 마부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물론 비장함 따윈 느껴지지 않을 ‘을’들의 소심한 반항이었지만, 그 장면은 은근히 통쾌했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인 이창근 기획실장은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고 무서움 또한 많고 여린 인간인지를 알리기 위해” 공중에 올랐다. 그러면서 ‘허니버터칩’ 만큼의 관심과 연대를 말했다. “굴뚝에 오르면서 허니버터칩이라도 챙길걸 그랬네요. 굴뚝 기둥에 한 20봉지씩만 묶어놨어도 좋았을 텐데, 지금보다 더 쌍용차 문제에 관심 가져줄걸 그런 생각을 하며 딱딱하게 언 ‘정(情)’이라는 초코파이를 점심으로 때우려 하고 있습니다.” -이창근 페이스북

우리는 ‘을’인가? 언젠가는 ‘갑’이 될 것이라는 드라마를 꿈꾸는 잠재적 ‘갑’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정확한 현실 인식만이 ‘갑’들의 세상에 균열을 낼 연대를 향한 희미한 끈이 될 것이다. 어렵지 않다. “이제 저희 몸에 손대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분명하게 이야기 하는 동료 곁에 함께 서는 것, 허니버터칩을 향한 관심 정도면 된다. 그렇게 다시, 시작하자. 








기고 2015. 4. 3. 00:07

[복음과상황]드라마보는여자-미생과 완생사이

[복음과상황] 12월호 - 드라마 보는 여자


세상 모든 '미생'들의 이야기

2010년 어느 날 7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예상치 못한 이유로 사직 의사를 밝힌 그날은 하필, 맑은 날이었다. 과분하게 쏟아지던 한 낮의 햇살에 떠밀려 걷다가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버스를 탔다. 울기에 좋은 버스였다. 7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눈물의 배웅을 받으며 어디로 가는지 모를 그 버스와 함께 부르릉, 떠나버렸다. 적지 않은 나이에 적당히 버티지 못하고 튕겨져 나오니 모든 것에 실패한 것 같아 황망했고, 지붕 없는 집에 홀로 남겨진 아이처럼 막막했다.

"근데 스물여섯 먹을 동안 뭐하고 살았길래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네. 아주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이네."
"그러게요. 스물여섯 살이 될 동안 뭘 했을까요? 난." -tvN 드라마 <미생> 1회 김동식 대리와 장그래의 대화.

첫 출근한 장그래에게 김동식 대리가 물었다. '스물여섯'이라는 숫자는 다르지만 그 질문은 몇 년 전 그날, 내가 나에게 던졌던 질문이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직면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미생>의 장그래는 바둑 프로 입단에 실패한 후 지인의 도움을 얻어 '낙하산'으로 종합상사에 착륙한다. 익숙했던 '바둑'이라는 세계 바깥, '직장'이라는 세계에서는 '스물여섯 먹을 동안 뭐하고 살았는지' 모를 사람이 되었으므로 그의 착륙은 사실, 불시착에 가까워 보였다. 단지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렸고 '열심히 하지 않아서 버려진 것'이라 스스로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속하게 된 새로운 세계, 직장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장그래 뿐 아니라 그의 입사 동기인 안영이, 장백기, 한석율과 영업 3팀의 오상식 과장, 김동식 대리 등 드라마 속 인물들 모두에게 치열한 공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생>은 가로 세로 열아홉 줄 바둑판과 같은 회사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지만 사실,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미생과 완생 사이

아직 살아있지 못한 상태. 드라마 제목인 '미생(未生)'의 뜻이다. 바둑에서 완전히 죽은 돌을 뜻하는 사석(死石)과 달리 미생은 완생할 여지를 남기고 있는 돌을 의미한다. 신적 존재가 아닌 이상 누구도 '완생'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살아있는 존재라면 필연적으로 '완생할 여지'를 끊임없이 채워야 하는 미완의 존재들이다. <미생>은 그 과정을 냉정하리만큼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장그래의 입사 동기인 장백기, 안영이, 한석율은 '낙하산' 장그래와는 달리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을 차곡차곡 쌓아온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맞이한 현실은 "스물여섯 먹을 동안 뭐 하고 살았길래" 핀잔을 들었던 장그래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장백기는 매순간 “이런 잡일을 하려고 내가 그토록 치열했던가?”라는 질문과 씨름해야 했고, 안영이는 '똑똑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모욕과 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는 대신 묵묵히 책상 걸레질을 하거나 쓰레기통을 비워야 했다. '미생' 뒤에 '완생'이라는 단어가 금방 따라붙을 것 같지만, 사실 어떤 세계에 적응하고 성숙하는 과정이란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그래봤자 바둑'과 같은 지리멸렬의 연속이다. 그리고 어쩌면 완생이란 영원히 내 몫이 아닐 수도 있다. 미생 다음은 완생이 아니라 수많은 미생들의 연속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인생은 잘못이며, 실패한 것인가?

"합격하고 입사하고 나서 보니까 말이야. 성공이 아니라 그냥 문을 하나 연 것 같은 느낌이더라고. 어쩌면 우리는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면서 살아가는게 아닐까 싶어." -tvN 드라마 <미생> 9회 김동식 대리의 말.

김동식 대리의 통찰처럼 우리는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면서'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에게 "완생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잘 버티는 삶"이라고. 도무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을 열고 한 걸음이라도 나가기 위해서는 일단 버티는 근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생>이 우리를 울컥하게 했던 이유는 '그럼에도 버텨주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고졸 출신' 장그래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코피를 쏟아가며 일하는 오상식 과장이, '빌어먹을 기본'을 익히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 장백기가, 매일 아이와 '이별'하며 출근하는 선지영 차장과 같은 워킹 맘들이 버텨주어 고마웠던 것 같다.

그렇다면 버티는 것으로 충분한가? 그들이, 우리가 '버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생>은 기본적으로 '완생'을 위해 '미생'의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버티는 개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고졸 출신' 장그래를 받아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현실적 공감이 미덕인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비현실적인 설정은 바로 그 '시스템'이 아닐까 싶다. 현실에서 장그래는 입사조차 못했고, 오상식 과장과 민동식 대리 대신 독하게 훈련시키는 강해준 대리, 안영이를 괴롭하는 하성준 대리, 마초의 전형 마복렬 부장과 함께 일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부당한 시스템 문제는 쉽게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는 게 우리가 겪는 현실이다.

‘장그래’가 자랄 수 있는 모판은 결국 좋은 조직과 사회다. 나쁜 조직과 사회는 개인들이 '버텨야 하는 이유'를 소멸시키는 방식으로 전진한다. 우리는 그 ‘나쁨’의 민낯을 여러 곳에서 뼈아프게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미생>에는 유난히 '기본'을 강조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361개의 바둑돌을 하나, 하나 얹어야 승부가 가능하듯 차곡차곡 쌓이는 '순간'의 가치가 존중받고, 개인의 최선이 합당하게 보상받는 기본 체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드라마를 보며 너무 쉽게 '미생‘ 옆에 '완생'이라는 단어를 두지 말았으면 좋겠다. 대신 치열하게 버티며 '자신만의 바둑'을 두는 사람을 서로 이해하며 '완생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시스템)'에 대해 더 고민하면 좋겠다. 

기고 2015. 4. 2. 23:53

[복음과상황]드라마보는여자:연애 '드라마'의 발견

[복음과상황] 11월호 ‘드라마 보는 여자’


여전히 연애 드라마 보는 여자


작년 이맘 때 <복음과상황>에 '비혼'에 관한 글을 기고했었다. "우리는 마감 직전 떨이 상품이 아니에요!"라며 비혼 여성의 인권을 당당하게 부르짖었지만 사실, 마음으로는 "내가 지금은 찌질하게 이런 글을 쓰고 있지만 내년에는 멋지게 연애할 테야!" 다짐을 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나는 '연애하는 여자'가 아닌 그냥 '연애 드라마 보는 여자'로 살아가고 있다. 드라마틱한 반전 따윈, 내 몫이 아닌 것이다. 일본에서는 나 같은 30대 비혼 여성을 '싸움에서 진 개(마케이누 : 負け犬)'라고 표현한다. 그 표현대로라면 나는 싸움에서 져도 크게 진 셈이다.

그런 나에게 ‘연애 드라마’는 ‘가상현실’과 같다. 가상현실이란, 어떤 특정한 환경이나 상황을 실제와 똑같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인데 ‘연애 드라마’라는 가상현실을 통해 나는 나의 연애를 상상하며 현재의 나를 성찰한다. 다음 싸움에서는 이겨보리라 다짐하며. 하지만 가상현실이 결코 내가 디디고 살아갈 땅이 되어줄 수 없듯 드라마는 그저 드라마일 뿐이다. 네모난 TV속 연애 드라마 바깥세상은 치열한 '싸움판'이다. '연애 드라마'는 결코 그 치열한 세상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연애 드라마가 결코 말하지 않는 것


한때 '노처녀'의 대명사였던 <내 이름은 김삼순>의 삼순 언니가 당시 나이 30세에 불과했고, 처절하게 <올드미스 다이어리>를 썼던 미자 언니도 그래봤자 32세였다는 사실을 아는가? 게다가 삼순이와 미자는 마침내 잘생기고, 스펙 좋은데 심지어 ‘나만 사랑하는’ 연하남과 사랑을 이루지 않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이름은 김삼순>이나 <올드미스 다이어리> 등의 드라마는 노처녀라는 ‘절대적 을’의 고민과 불안을 비교적 현실적으로 풀어냈다지만 요즘 ‘연애 드라마’는 아예 그런 현실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연애의 발견>은 요즘 ‘연애 드라마’의 전형이다. 주인공들의 직업은 의사(거의 성형외과 의사), 인테리어 회사 사장, 가구 디자이너이며 넉넉하게 물싸움을 할 수 있는 널따란 정원이 있는 ‘그림 같은 집’에 산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친구들과 함께 사는데 집이 얼마나 넓은지 그 집 화장실 크기가 내 방 크기와 맞먹는다(요즘 드라마의 직업 구성 및 주거 환경의 경향은 대체로 비슷하다). 진로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으니, 학자금 대출이나 취업 문제가 연애와 결혼의 발목을 잡지 않는다. 전 · 월세 올려달라는 주인의 말에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된다. 연인과 함께 간 식당이나 커피숍에서 계산할 때 ‘모양 빠지게’ 쿠폰을 내밀지 않아도 된다. 단지, 연애에만 몰두하면 될 일이다.

<연애의 발견>이 결코 말하지 않는 풍경 속에 연애를 ‘발견’조차 할 수 없는 우리가 있다.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성호 부연구위원은 <최근 미혼 인구의 특성과 동향 : 이성교제를 중심으로>라는 보고서에서 미혼 남녀의 낮은 소득과 불안정한 고용이 ‘연애 포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통계로 입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18~49세 비혼 남녀 가운데 현재 이성교제를 하고 있는 비율은 남성이 33.8%, 여성이 35.6%에 그친다고 한다. <연애의 발견>이 몰입감 높은 스토리로 ‘연애 세포 부활’을 외칠 때 미래가 불투명하고 지갑이 얇은 청춘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연애는 하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며 연애 자체를 포기하며 사는 것이다(참고 : <시사인> 364호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다’).

<연애의 발견>속 청춘들이 그렇게 연애에 몰두할 수 있고, 연애 때문에 아파하는 모습마저 반짝거릴 수 있었던 이유는 어쩌면 그런 살풍경한 현실을 굳이 살아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 것이다. ‘고민할게 연애밖에 없는 사람들의 연애’인 것이다. 그런 그들을 향해 드라마 속 누군가는 이렇게 일갈했다. 


“정신 차려! 사랑이 뭐라꼬. 사랑이. 사랑이 뭐 그리 대단하다꼬. 밥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이야.” -14회. 강태하(문정혁)와 남하진(성준)이 식당에서 서로 주먹 다툼을 하다가 가게 된 경찰서에서 그 식당 아주머니의 말.

연애도 사람 사는 일인데


‘무슨 드라마를 그렇게 까칠하게 보는가?’ 라는 질문을 받으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나는 <연애의 발견> 애청자였다. 위와 같은 비판을 하며 투덜거리면서도 <연애의 발견>을 즐겨봤던 이유는 그동안 ‘연애 드라마’를 즐겨봤던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적 편견에 상처받는 ‘30대 후반 비혼 여성’이지만 나는 여전히 연애를 꿈꾸는 사람이고, 세상을 ‘연애’로만 채우는 어떤 이들이 부럽다. 그렇기에 ‘한여름의 연애’가 아니라 ‘오수경의 연애’를 상상하며 ‘연애 드라마’라는 ‘가상현실’을 즐겼다.

<연애의 발견>은 굳이 좋은 사람으로 남으려 노력하지 않고 ‘나쁜 년’ 소리를 들으면서라도 ‘한여름(정유미)’ 자신을 위한 연애를 하라는 이야기를 전하며 끝을 맺었다. 취업, 학자금 대출, 집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팬시상품’같은 연애 이야기에 설렐만한 나이도 지났지만 새삼 마음이 찡했던 이유는 ‘사랑이 별건가.’ 싶으면서도 ‘사랑이 별거지!’ 라며 서로에게 다가서는 사람들이 이야기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동화 속 주인공처럼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결말을 기대할 수는 없어도,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일보다 불투명한 미래와 빠듯한 현실이 버겁게 다가와도 꿋꿋하고 뻔뻔하게 연애 하자. 가능하다면 ‘연애가 전부’인 사람들처럼 살아보자. 전쟁 중에도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가난한 시절에도 어디선가 아이는 태어났듯 연애도 결국 사람 사는 일 아니겠는가. 내년에는 꼭 '연애 하는 이야기'를 쓸테다. 

“동화에나 나온 이야기니까 됐고, 나는 니들한테 다른 엔딩이 보고 싶었단 말야. 그들은 싸우고, 토라지고, 오해하고, 의심하고, 실망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려고 함께 노력했습니다, 그런 결말. 그럼 나도 니들 보면서 동화에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진짜 사랑을 발견하고 싶었던 말이야. 현실에 발붙일 수 있는 그런 사랑, 나도 꿈꿀 수 있는 그런 사랑.” -12회. 윤솔(김슬기)이 강태하(문정혁)에게.


기고 2014. 10. 24. 21:02

[날마다주님과] 사회/문화 읽기 : 가족끼리 왜 그랬어요?

[날마다주님과] 사회/문화 읽기 11/12월호 


가족끼리 왜 그랬어요?



어느 막장 가족 이야기


선생님은 우리를 '동생'처럼 여기셨다. 친근하게 말을 하고, 살갑게 대해주었다. 때때로 우리에게 장난을 걸기도 했다. 미술 과목을 담당하던 선생님은 종종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옷을 아무리 입고 있어도 나는 너희들의 누드를 그릴 수 있어." 그 친근하고 살가운 선생님 별명은 '미친개'였다. 그 '미친개'가 요즘에는 '개저씨'로 진화했다고 한다. 개와 아저씨를 섞은 신조어다.


'개저씨'들은 유난히 가족을 사랑한다. 캐디의 신체 부위를 여러 번 만진 혐의를 받고 있는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딸만 둘이라서 여성들을 보면 내 딸처럼 귀엽고 손녀처럼 정답고 해서 내가 등을 쳤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다." 정직원 심사를 앞두고 있는 여성 직원을 자신의 오피스텔로 불러 성추행한 혐의로 송사에 휘말린 상무가 다닌 출판사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강조하며 상사와 직원들끼리 '프리 허그'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였다고 한다. 도지사의 아들인 남 모 병장은 후임 병을 폭행하고 추행한 혐의가 밝혀지자 "가족같이 생각해 그랬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상황은 다르지만 해명은 동일했다. 눈물겹고 애틋한 빌어먹을 '가족애'가 문제였다. 딸이 예쁘다고 가슴을 만지고, 원치 않는 프리 허그를 제법 진하게 하고, 함부로 때리고 장난감으로 삼을 수 있는 가족은 도대체 어떤 가족일까? '개저씨'들의 가족이니 '개가족'쯤 될 것이다. 이래저래 개에게 미안하며, 좋은 뜻으로 시작하였던 '프리 허그'가 한국에서 고생이 많은 것 같아 유감이다.


(성)폭력은 무엇의 이름인가


고백하자면, 박희태 전 국회의장 성추행 기사를 접했을 때 시큰둥했었다. 이런 일은 '지긋지긋한 관절염'처럼 비일비재하기에 오히려 하필 '딱 걸린' 그 노인이 딱하다는 생각도 약 5초간 했다. 그런데, 성추행이나 추문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그 '행위'가 쟁점이 되어버리는 현실은 안타깝다. 그가 캐디의 가슴을 '찔렀는지' 혹은 '만졌는지'의 논란이나 남 모 병장이 후임 병에게 '구강성교'를 강요했다는 상상을 자극하는 증언들이나 '딸 같아서'라는 말들에 '나도 당신 딸을 딸처럼 여겨 만져도 되겠나?' 대꾸하는 일들은 어쩌면 부차적 문제일지 모르겠다. (성)폭력은 그저 욕구를 참지 못한 남성의 '변태적 일탈'로 해석하면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개저씨'와 그만큼 많은 '개가족'을 만나게 될 것이다. 추문 너머에 견고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권력과 힘, 각종 차별의 상관관계를 해석해야 이런 일련의 현상이 고발하고자 하는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해명을 정리해보면 대략 1) 술에 취해서  2) 딸(동생) 같아서 3)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아서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2)는 지극히 가부장적이며 성차별적 사회 구조가 낳은 비극이며 2)는 곧 3)과도 연결된다. 나는 3)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 생각한다.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은' 상황과 권력(힘)은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다. 캐디의 몸을 만졌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상대방이 내가 골프장 홀을 돌면서 여러 차례) 어깨나 등을 치거나 엉덩이 만지거나 그랬다고 하는데 그 때 한 번만 싫은 표정을 지었으면 그랬겠냐. 전혀 그런 거부감이나 불쾌감을 나타낸 일이 없다."고 해명했다. 만약 불쾌감을 나타냈다면 캐디는 어떻게 되었을까?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 그 캐디가 저항하지 않는 이유를 몰랐을 리 없다. 오피스텔에서 출판사 상무의 행위에 대해 검찰은 "여성이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소를 하지 않았다. 상무의 추행을 거부하며 항의했더라면 정직원 심사를 앞둔 그 만년 비정규직 여성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자 ‘가족같이 프리 허그'를 강조하던 출판사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떤 것을 빌미로 성을 요구하는 사람은 물론 충분히 거절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응하는 사람 역시 징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말한 '충분히 거절할 수 있는 상황'이란 어떤 상황이며 어느 순간까지 자연스러운 '프리 허그(Free Hug)'이며 어느 때부터 저항하지 않은 값을 모멸로 치러야 하는 '페이 허그(Pay Hug)'인걸까? 그 판단은 도대체 누구의 몫이기에 피해자들이 오히려 '저항하지 않은 죄'를 오롯이 뒤집어 써야 하는가? 이런 경우도 있다. 얼마 전, 12세 여아 성폭행 범에게 검찰은 '의제 강간(피해자가 일부 동의하거나 혹은 반항하지 않았을 때 적용)' 혐의를 적용하여 형량을 낮춰 구형했다. 아이가 “가만히 있었다.”는 이유다. 아이는 왜 가만히 있었을까? 아이는 그 순간을 "무서웠고 죽일 것 같았다."고 기억했다. 작고 여린 12세 여자 아이가 커다랗고 힘 있는 존재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힘껏 저항하다 죽었어야 했던가? 언제나 그랬다. 책임은 '저항하지 않은 여성' 혹은 '몸 단속 제대로 못한 여성'에게 있는 법이다. 사회적 인식과 법 등 모든 것이 협력하여 남성들의 ’개인적 일탈‘을 변호해 준다. 피해자가 살해되거나 회복 불가능한 만신창이가 되어 세간의 화제가 된 예외적 경우가 아니라면 언제나 그들의 범죄는 '정상참작'된다. 그러므로 (성)폭력은 권력과 힘의 추한 민낯이며, 약한 존재를 함부로 여겨도 죄가 되지 않는 광범위한 차별의 다른 이름이다.


교회라고 다를까? 교회처럼 '가족애'가 넘치는 곳이 또 있을까? '우린 주안의 한가족' 찬양을 부르며 서로를 형제요, 자매라 부르는 곳이고, 심지어 목회자를 ‘영적 아비’로 여기는 영적 혈연 공동체다. 교회라는 가족도 결국 박희태, 남 병장, 출판사가 말하는 ‘가족’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원리로 작동한다. 굳이 ‘전병욱’이라는 이름을 들추지 않아도 교회에서 경험했던 불쾌한 성추행, 가부정적이며 권위적인 구조에서의 차별의 경험 ‘썰’을 풀어보자면 50부작 막장 드라마 급이다. 보호받아야 할 성추행 피해자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탄이나 ‘신천지’가 되며, ‘신학은 배울 수 있어도 목사는 될 수 없다’는 법이 당연하게 존재할 수 있는 곳이니 어쩌면 사회보다 더 거룩하게 지독한 ‘가족’이기도 하겠다.



햇빛 속으로 걸어 나온 사람들


상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출판사 여직원의 폭로 이후 또 다른 폭로가 봄날 꽃망울 터지듯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가족 같은 권위에 눌려 강제로 ‘프리 허그’를 당하면서도 살아남기 위해 침묵을 강요당했던 이들의 연대가 시작된 것이다. 출판사 여직원의 폭로에 대해 소설가 정세랑 씨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우리 모두의 악몽을 햇빛 속으로 끌어냈습니다. (중략) 당신은 깃발을 드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깃대는 생각보다 무겁고 휘청이는 물건입니다. 당신의 몸무게가 줄어들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팔 힘은 오히려 좋아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당신은 각오가 되어 있고 당신이 원하는 승리는 간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끔 깃발을 대신 들어주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한 줌일지언정 햇빛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히는 사람, 깃발을 드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야 사회가, 교회가 한 뼘이라도 진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이상한 표현이겠지만, 고발이 있기 전에 그것은 죄가 아니다. 즉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런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로 누군가는 ‘가족 같은 분위기’를 견뎌야 하고, 이를 악물고 ‘프리 허그’를 참아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겨우, 세상에 대롱대롱 매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과 힘의 구도에서 약자가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없는 사회, 누군가의 문제제기를 뭉개버리며 유지하는 공동체에는 단언컨대, 희망이 없다. 전(현)직 고위 공무원이라는 추한 노인, 직장 상사라는 개저씨, 복종과 침묵을 강요하는 개가족 구성원들만 번들거리는 얼굴로 넘실거릴 뿐이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목 놓아 노래를 불러도, 그런 ‘가족’ 구성원 되기 싫다. 그러니, 우리 조금 더 까칠하게 살아보자. 더 많은 사람들이 햇빛 속으로 걸어 나오도록 말이다.



기고 2014. 10. 24. 20:54

[큐티진] 주제가있는책 : 누가 고통의 '충분'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큐티진] 주제가있는책 10월호 


누가 고통의 '충분'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몇 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의 셋째 딸이었던 엄마는 장례를 치르며 거의 울지 않았다. 나는 그런 엄마가 한없이 낯설어 '엄마 잃은 엄마'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엄마 곁을 맴돌기만 했다. 그러다가 장례 이틀째였던가, 함께 밥을 먹다가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이 멸치볶음 참 맛있지. 우리가 볶으면 왜 이런 맛이 안 날까?" 엄마는 설핏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맛있네. 물엿을 많이 넣었을까?" 엄마의 대답에 나는 비로소 안도했고, 우리는 그렇게 지구가 태양 주변을 어김없이 돌듯, 일상이라는 궤도로 다시 돌아왔다. 그로부터 1년 후 어느 여름날이었던가, 복숭아를 먹던 엄마가 건조하게 말했다. "수경아, 느이 외할머니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이때도 엄마는 울지 않았다. 다만 '배고파' 혹은 '졸려' 라는 말을 툭 던질 때와 똑같은 얼굴, 비슷한 억양으로 말할 뿐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고통은 결코 궤도 밖의 일이 아니며, 상실은 우리의 필연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떤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완전한 타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교회 다니며 가장 흔하게 듣고, 쉽게 했던 말들, ‘안식, 쉼, 치유’는 상상만 해도 폭신한 질감이 느껴지는 단어들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그 익숙한 단어들이 낯설고 어렵게 느껴진다. 교회 친구의 슬픔에 대해 “너의 마음 알아. 이해해" 라는 말이 얼마나 부질없었는지, 아버지를 잃은 후배에게 "하나님이 너의 마음 다 위로해 주실 거야. 그러니 힘내" 라는 위로가 얼마나 성급했는지, 세월호 참사 등 뜻밖의 고통에 직면한 타인에게 우리는 얼마나 무정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 전 나는, 고통은 측량 가능하고, 유통 기한이 명확한 종류의 감정이던가? 충분한 고통을 겪지 않고 안식과 쉼, 치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정당할까? 하나님도 인간의 고통을 고통스러워하실까? 따위의 '대답 없는 질문' 앞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그런 우리를 '통곡의 벤치'에 앉힌다. 사랑하는 아들, 에릭을 잃고 쓴 그의 책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의 원래 제목은 <아버지의 통곡>이었다고 한다. 제목 그대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통곡의 벤치'에 앉아 상실의 고통에 대해 정직한 신음을, 하나님을 향한 '대답 없는 질문'을 쏟아낸다. "대답 없는 질문이 전 인류의 상처가 되었다"는 그의 표현대로, “언제나 한 사람이 모자라는 이 황폐한 땅에서 내가 어떻게 축제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인가?”라는 그의 질문처럼 세상의 모든 고통은, 삶의 지축을 뒤흔들며 마땅한 믿음에 균열을 내며 밀려든다. 그리고 그 고통은 ‘전 인류의 상처’로 남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에 대해  ‘완벽한 타자’일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당사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사유와 언어는 빈곤하고, 성급하기만 하다.


롤랑 바르트는 이에 대해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탄식한다. 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1977년 10월 25일 어머니 앙리에트 벵제가 사망한 다음 날부터 1979년 9월 15일까지 2년 동안 ‘마망’을 애도한다. 그의 책 <애도일기>는 ‘격렬한 슬픔의 습격’을 당한 그가 집요하게 기록한 고통의 결정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아마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다(어쩐지 그런 것 같다). 나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하지만 한 사람이 직접 당한 슬픔의 타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측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바르트가 전적으로 옳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고통의 시간이 연장될수록 사람들은 피로감을 느낀다. 내 이웃이 겪는 고통에 잠시 손을 잡아줄 수는 있지만 ‘일상’도 놓치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재의 고통을 성급히 끊어내고 안식과 쉼, 치유로 서둘러 내달리고 싶어 한다. 그럴듯한 합리다. 하지만 무엇을 ‘일상’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어디부터가 극복해야 할 ‘비일상’인걸까? ‘언제나 한 사람이 모자라는’ 현실을 살아야 하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이나 월터스토프의 일상, 마망을 상실한 바르트가 겪는 고통, 커다란 복숭아씨처럼 가슴에 박힌 ‘엄마 잃은 엄마’의 그리움은 결코, 돌아갈 수 없는 현재이며 겪어내야 할 미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 성급한 위로를 거두어야 한다. 누구도 고통의 ‘충분’을 이야기할 수 없다. 다만 상실과 고통의 순기능을 어렴풋하게 믿으며 느릿하고 깊게 함께 겪어야 할 뿐이다.



기고 2014. 10. 24. 20:48

[복음과상황] 드라마보는여자 : 정말 사랑이 우리를 괜찮게 할까?

[복음과상황] 드라마보는여자 10월호


정말 사랑이 우리를 괜찮게 할까?




그때 울었다면 지금 덜 아팠을까?


어느 날 새벽, 잠결에 내 방 대각선 건너편 집에서 남자 어른이 아이처럼 엉엉 엉엉 우는 소리를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간밤의 그 울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말갛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의 안부가 궁금하여 페이스북에 '간밤에 울던 남자 어른' 이야기를 썼다. 이런 댓글이 달렸다. "안산 지역은 지난봄부터 새벽에 그런 일이 자주 있습니다" 그 댓글을 읽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안산에서, 건너편 집에서, 그리고 어딘가에서 간밤에 울던 그들이 소리 내어 울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마른 울음을 울었을까. 셀 수 없이 많은 그 '울음들'을 비정하게 묻어버리고 침묵하는 '마음의 공동묘지'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드라마도 그런 세상의 흐름을 비껴갈 수 없었을까. <괜찮아, 사랑이야>는 차마 울지도 못하여 '마음의 감기'를 앓고 있는 현대인들을 '클로즈업'하여 집요하게 소환한다. 아픈 아버지를 곁에 두고 어머니가 바람피우는 장면을 목격했던 소녀(지해수)는 불안장애를 앓는 어른이 되었고, 의붓아버지와 형의 폭력에 시달리던 16살 소년(장재열)은 그 트라우마로 인해 환시(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무엇이 보이는 것처럼 느끼는 현상)를 경험하는 정신분열증과 강박증에 걸린 어른이 되었다. 그와 함께 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집에 불을 질러 남편을 죽였지만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는 해리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상태로 살고 있다. 또 다른 폭력의 가해자이기도 했던 장재열의 형(장재범)은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른이 되었다. 자신이 '투렛증후군'과 '품행장애' 환자라는 사실을 마치 명함 내밀듯 세상에 밝혀야 하는 박수광과 오소녀도 사실, 외롭고 불안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비록 드라마 속 가상의 인물이지만 '마음의 감기'를 앓고 있는 우리의 병증을 끊임없이 자각하게 하는 존재들이다.


"그때부터였을걸. 재열이는 화장실에서 자고, 나는 문 닫힌 방에서 못자고. 요즘 그 생각이 부쩍 자주 나면서 그때 우리가 둘이 부여잡고 울었어야 되나, 재열이가 아픈 게 그때 못 울어서 병난에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괜찮아 사랑이야> 15회.


남편의 폭력을 피해 다급하게 숨었던 '공동변소' 안에서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뛰어 들어온 아들을 만났던 어머니는 그때 아들과 함께 울지 않았던 일을 뒤늦게 후회했다. 그때 울었다면, 지금 덜 아팠을까? 드라마는 후회하는 어머니를 대신하여 그때 울지 못했던 그들이 충분히 울고, 아파하며 서로를 토닥거릴 수 있도록 시끌벅적한 상처의 공동체를 만들어 주었다. 사실 이런 방식은 노희경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낯선 방식이었다. 등장인물들의 상처를 느릿하고 둥글게 설득시켰던 이전 작품들에 비해 성급하고 날카로워졌다. 마치 상처를 도려내어 고치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충만한 의사의 매스처럼.


나는 작가의 진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지해수와 장재열의 사랑이 로맨틱해도 '쉐어하우스'라는 공간이 매력적으로 보여도 진짜 사람이 아닌 가상의 존재인 강우를 통해서 위로를 받아야 했던 장재열의 고독을, 어머니를 향한 지해수의 죄책감을, 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카락 수만큼 헤아리기 어려운 장재범의 분노를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하여 드라마 속 장면이 예쁠수록, 내용이 경쾌할수록 나는 반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것 같지? 나만 빼고 다 멀쩡한 것 같지? 착각하지 마. 우리 모두 아파. 지금은 응급 상황이야. 세상은 거대한 상처의 공동체라고!'



‘얼굴 빨개지는 아이’에게는 ‘재채기하는 아이’가 필요하다


상처의 공동체,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드라마가 제시한 방법은 선명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최대한 좁히고, 사랑의 밀도를 촘촘하게 채워 울고 싶으면 울고, 아프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며, 불행을 고백하며 함께 살아보자고. 어쩌면 드라마처럼 지금 우리는 모두 지독한 '마음의 감기'를 함께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봄부터 울음이 사라지지 않는' 곳이 안산뿐일까. 4월 16일 이후의 시간들이 우리에게 어찌 그저 '타인의 시간'일 수 있겠는가. 차갑고 소란스러운 광장에 존엄을 내팽개치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우리는 과연 누구이며 누군가의 울음을 무력하게 방치하는 사회가 과연 사회일 수 있는가. 지난봄부터 이어지는 질문은 아직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 이 드라마가 그 답을 찾는 길을 흐릿하게나마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말 사랑이 우리를 괜찮게 할 수 있을까?


드라마와 어울리지 않게 드라마를 보며 나는 장 자크 상뻬의 그림 책 <얼굴 빨개지는 아이>(열린책들)를 생각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얼굴이 빨개져서 고민이 많은 마르슬랭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재채기를 하여 외톨이인 르네가 필요하듯 마음의 감기를 앓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알아봐 주고, 토닥거리며 살아가는 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겠나 싶다. 마음의 감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그 감기를 지독히 앓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다만, 홀로 앓지 않도록 곁을 내어주고 함께 버틸 수 있는 사회라면 덜 아프지 않겠나 싶다. 드라마 속 인물들이 서로를 비껴가거나 적당히 거리를 두기 보다는 징글징글하게 끌어안고 함께 울며 마침내 치유의 공동체로 진화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장재열 어머니처럼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충분히 울자. 함께.


"마르슬랭은 감기에 걸릴 때마다 그의 친구처럼 기침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흡족했다. 그리고 르네 역시 햇빛을 몹시 쬔 어느 날, 그의 친구가 가끔씩 그러는 것처럼 얼굴이 빨개져 버린 것이 아주 행복한 적이 있었다. 둘은 정말로 좋은 친구였다." -장 자크 상뻬, <얼굴 빨개지는 아이> 6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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