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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력강한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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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015. 4. 3. 00:31

[주간경향][그래, 나는 일을 못한다] "나의 칼퇴를 막는 이 누구인가?"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오늘도 나는 모두 퇴근해 텅 빈 사무실을 나오며 중얼거렸다. 원래는 "회사(학교) 다녀오겠습니다."가 바른 용례일지 모르나 적어도 나의 경우는 반대로 쓰인다. 하루 24시간 중 집에 머무는 시간이 평균 10시간 정도인데 그마저도 취침 포함 시간이니 "우리 집에는 하숙생이 한 명 있다."는 엄마의 판단은 지극히 옳다. '칼퇴(칼퇴근)'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렇다. 우리는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권리가 있고 나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칼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칼'같지 않다. 세상 어딘가에는 나의 '칼퇴'를 막는 세력이 존재하는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각종 웹사이트 해킹이나 정보 유출 사건 등 국내에서 벌어지는 굵직한 사건은 언제나 '북한 소행'으로 밝혀졌다. 이 음모론은 마치 '굶으면 배가 고프다.' 혹은 '출근하면 퇴근하고 싶다.'라는 표현처럼 지극히 쓸모없는 가설이 된지 오래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내가 '일못(일 못하는 사람)'인 이유도 '북한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나는 비겁하게 북한을 거론하지 않겠다. 그렇지 않아도 나를 '일못'으로 만들어 '칼퇴'를 막는 이유는 널렸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다. 어느 날 모 은행을 방문하여 통장 거래를 시도했는데 은행 직원은 통장 마그네틱선이 손상되어 거래할 수 없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주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나는 어제까지 멀쩡하게 사용하던 통장이 왜 하필 오늘 먹통이 되었는지 물었지만 그것이 어디 은행 직원 탓일까. 결국 시간을 홀랑 까먹고 야근을 했다. 다른 은행에서도 공인 인증서를 갱신하기 위해 홈페이지에 접속했다가 반나절을 날린 경우도 있었다. 어디 이 뿐일까. 사회 곳곳에 암약하다가 툭 튀어나오는 '일못'으로 인해 나도 덩달아 '일못'이 되어 사이좋게 서로 벙글거리며 웃다 헤어진 적도 많다. 신경림 시인의 책 제목처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정겨운 법인가 보다.

'일못 음모론'의 최고봉은 역시 공공의 적 '엑티브엑스'가 아닌가 싶다. 대부분의 공공 기관 홈페이지나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하려면 컴퓨터에 정체모를 프로그램을 깔아야 한다. 송금이나 결제 따위의 단순 업무와 이 복잡한 프로그램이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 궁금하지만 물어볼 수 없다. 며칠 전에 깔았던 프로그램을 왜 또 깔아야 하는지 따질 수도 없다. 그저 프로그램을 설치하겠냐는 물음에 그 흔한 밀당이나, 저항조차 하지 않고 순순히 '예' 버튼 누르기를 무한 반복하는 '예스맨'이 되어야 한다. 그런 보람도 없이 결국 실패하면 기계에게 농락당한 기분마저 들기도 한다. 혼자 해결하겠다고 버둥거리다가 컴퓨터를 잘 아는 동료에게 물어봤을 때 "껐다 켜세요."라는 한마디를 핀잔처럼 전해 듣거나 내 손에서는 고집스럽게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그 동료가 손만 댔을 뿐인데 '모세의 기적'처럼 스르륵 해결되는 경험을 하게 된 날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만 빼놓고 소풍가버린 날 같다.

괜찮다. 다 괜찮다. 주어진 업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얼마든지 '예스맨'이 될 수 있다. "엑티브엑스 만든 놈 누구야!!!"를 백만 번쯤 외치다 보면 언젠가는 웹페이지가 열리리라는 '신앙'으로 버틸 수도 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과연 내가 '일못'이어서 생긴 결과일까? 며칠 전에는 접속한 웹사이트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결국 상담원과 연결하여 원격 지원을 받아 약 한 시간 만에 문제를 해결했다. 알고 보니 시스템 문제였고, 나는 결국 야근을 했다. 이런 경우 야근을 하게 된 나는 '일못'인건가? 어떤 사람을 '일못'과 '일잘(일 잘하는 사람)'로 구분하기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촘촘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고, 지극히 복잡한 시스템에 우리 스스로를 맡겨버렸기 때문이다. 미국에 본사가 있는 페이스북 오류가 발생하면 다른 나라의 누군가는 '대략 난감' 상태가 된다. 반대로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어떤 작은 일이 어느 나라에서는 큰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일못'인지도 모를 일이다. '북한 소행'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우겨보고 싶)다.

오늘도 나는 '일잘'을 꿈꾸었으나 (거대한 음모로 인해) 실패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텅 빈 사무실에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야근을 하다가 뿌듯한 마음으로 컴퓨터를 끈다. 아뿔싸. 하필 오늘 같은 날 컴퓨터는 (시키지도 않은) 시스템 업데이트를 시작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집에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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