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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영화] 2014. 3. 18. 21:25

[노예12년]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신앙일까, 양심일까?




동전의 크기를 못 넘는 야만의 역사


“최소한의 양심도 없습니까?” '깜둥이' 노예 플랫의 첫 주인 윌리엄 포드의 말에 엄마와 아이들을 기어이 떼어놓으려는 노예 상인은 그렇게 대답한다. “내 양심은 동전의 크기를 못 넘어요.” 인간의 역사가 위대하다고 하지만, 사실 '동전의 크기도 못 넘는' 야만의 역사를 은밀하게 감추며 흘러왔다. 영화 <노예 12년>은 그 야만의 역사를 정직하게 들춰 묵직하게 고발하는 영화다.


“당신은 나를 가둘 권리가 없소.” 자유인으로 태어나 행복하게 살던 예술가에서 하루 아침에 노예가 된 솔로몬 노섭은 자신을 가둔 노예 상인들에게 ‘권리’를 부르짖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주장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한 단어, 권리. 그러나 솔로몬 노섭이 당연히 누려야 할 그 언어는 폭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노예시장에서 1000달러에 팔린 ‘특출난 깜둥이’일 뿐이었다.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권리와 존엄마저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 전 1840년대 미국은 북부의 자유주(州)에서 흑인을 납치해 남부의 노예주(州)로 팔아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솔로몬 노섭이 그 당사자였다. 그후, 솔로몬 노섭은 '플랫'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솔로몬 노섭이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그 12년의 세월을 밀도있게 보여준다. 그나마 선한 양심을 가졌던 백인 주인 윌리엄 포드에서부터 악랄한 백인 지주와 상인들에 이르기까지 착취자는 야만스러웠고, 그저 백인들의 '재산'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노예 플랫과 '깜둥이'들의 삶은 비참했고, 무기력했다. 


“목숨 건지고 싶지 않소. 살고 싶지.” 이 한마디는 솔로몬 노섭이 야만의 시간을 힘겹게 견딜 수 있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지옥같았던 12년에 비해 노예 플랫이 다시 솔로몬 노섭이 되는 과정은 비교적 간단했다. '자유 증명서는 소유 증명서를 이긴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이는 것이었다. 너무 간단하여 그의 '12년'이 더 슬프게 느껴졌다. 게다가 솔로몬 노섭이 다시 찾은 자유는 반쪽 자유였다. 그는 자유를 찾았으나 '세월'을 잃었고, 자신을 부당하게 팔아넘긴 일당들과의 소송에서는 졌다. 또한 노예 해방 운동을 벌였던 그의 죽음은 석연치 않았다. 즉, 세상은 (아직) 변화하지 못한 상태로 영화는 건조하게 끝났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신앙일까, 양심일까?



영화에서 착취자들은 노예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착취를 정당화시킬 성경구절을 찾아 은혜롭게 세뇌를 시켰다. 반면 노예들은 그런 착취자들의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하여줄 '신의 정의'를 끊임없이 갈망했다. 살기 위해 정의를 갈망하는 노예들에게 착취자의 은혜는 곧 폭력이었다. 이 가슴 아픈 간극을 지켜보며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신앙일까, 양심일까?" 물론, 선명하게 구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신앙이 양심을 견인하지 못할 때 그들의 신은 잔혹하고, 때론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신의 정의를 믿으며 행동하는 양심이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 영화가 개봉될 즈음 한국에서는 '염전 노예'라는 경악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노예'라는 단어가 그렇게 1840년대의 미국과 2014년의 대한민국을 연결지을 수 있는 단어라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영화는 끝났지만 인간에 대한 존엄이 무시되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긴 인간이 존재하는 야만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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